1.

 

예산안이 통과된 모양이 영 안좋다는 건 이론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의석수만 믿고 단독으로 통과시킨 한나라당이나, 정치력으로 풀지 못하고 물리력으로 막다가 폭력 사태를 일으킨 민주당 등 야당이나 어디 가서 좋은 소리 듣기 어렵지요. 그렇게 허겁지겁 통과시킨 예산에 구멍난 곳이 없다면 그게 더 신기한 일입니다.

 

재미있는 건 그 후폭풍의 방향입니다. 듀게에도 짤이 떴지만, 수많은 민생 예산이 날아갔습니다. 하지만 한나라당이 즉각 실수였음을 인정하고 사과한 것은, 다름아닌 템플스테이 예산이었습니다. 아마 일반국민들 불러놓고 영유아 예방접종, 극빈층 도시락 예산과 템플스테이 진흥 예산 중에 어떤 것이 급하냐고 묻는다면? 아마 열에 아홉은 전자를 택할겁니다. 하지만 조직적으로 뭉쳐서 빡쳤다고 티낼 수 있는 건 불교계였고, 한나라당이 사과한 대상도 역시 불교계였습니다. 결국 조직력과 큰 목소리가 힘이라는 걸 드러내는 씁쓸한 일입니다.

 

한나라당이 단독 통과시킨 예산에서 각종 서민 복지 예산이 삭감된 것은 빡치는 일입니다만, 솔직히 계속 붙들고 있을 떡밥도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초기에 "한나라당이 이런 삽질을 했어요~" 라고 강렬하게 인식시키기엔 좋은데, 사실 한나라당이 그 반대를 못하란 법도 없습니다. 그 수많은 예산중에 찾아보면 분명히 증액된 서민 복지 예산, 혹은 서민복지는 아니더라도 증액의 필요성이 인정되는 예산도 있지 않겠습니까? 증액시킨 예산들만 편집해 모아놓고 한나라당이 "우리의 업적"이라고 자랑한다면 아마 비웃음을 사겠죠. 반대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2.

 

'국익'을 위해서 뭘 어떻게 하라는 건 대단히 촌스럽게 여겨집니다. G20 같은 생 난리는 매우 짜증나죠. 그나마 올림픽이나 월드컵 정도 되면 모를까, G20 한 번 했다고 국격이 높아진다는 걸 누가 믿으라는 건지. "그거 하면 국격도 높아지고 좋은데 거 좀 불편하다고 이렇게 반대하면 되겠어?" 라는 사람에게 "흠.. 국격이 높아지고 국가 홍보가 된다 이거지? 요 직전 G20 개최지가 어디지? 그 직전은?" 이라고 물었을 때, 제대로 대답하는 경우 한 번도 본 적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국격'이 높아진다기보다는 국가에 대한 홍보가 된다 정도가 적당하겠네요. 하여간, 올림픽이나 월드컵은 최근 3개 대회까지는 그나마 개최지 이름이라도 기억하는 사람이 많은데, G20은 그냥 동네 반상회일 뿐입니다.

 

하지만 저도 촌스러운 유전자가 박혀있는지, 아니면 나이먹으면서 보수화되고 있는진 몰라도, 가끔은 "저 친구들은 '국가'가 정말 그렇게 싫은가?" 싶기도 합니다. "같은 한국인으로서..." "국가의 위상을 제고하기 위해..." 라는 말이 들어가면 무조건 싫어하는 경향을 보이는 친구들이 있는데, 전 그런 구호를 내세워 삽질을 하는 건 싫지만, 그런 구호 자체가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좋건 싫건 현재 세계는 국가를 큰 구분점으로 삼아 돌아가고 있고, 한 나라의 이름, 도시, 관광지, 음식이 널리 알려지는 건 굳이 싫어할 일도 아니며, 그걸 위해 돈을 쓰며 노력하는 것이 쓸데없거나 촌스러운 짓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아직은 잘 상상이 안되긴 합니다만, 언젠간 정말 국가에 대해 저와는 전혀 다른 관념을 가진 세대가 대세가 될 수 있겠구나 생각합니다. 사실 어릴 때 제가 가졌던 가족, 친지, 집안에 대한 관념과, 지금 현 시점에서의 그것은 정말 눈에 띄게 달라졌습니다. 그런 속도의 관념 변화가 국가를 대상으로 생긴다면, 전 지금 생각 그대로 나이가 들어서 지금 제가 비웃고 있는 어버이연합 정도의 꼰대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 아찔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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