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부산국제영화제 잘 갔다 왔고 감상한 작품에 대해서는 이럭저럭 만족했습니다만 (그러나 간만에 폭탄도 하나 걸렸어요. 흙흙.) 영화제 운영은 제가 지금껏 가 본 여러 국제영화제 중 가장 문제가 심각했기에, 그 이야기를 조금 하려고 합니다.

 김동호 위원장님께서 물러나신 뒤 치르는 첫 영화제인데다 영화의 전당이라는 초대형 중심지를 새로 건립하여 선보인다는 명목상의 무게 때문이었을까요, 이번 부산국제영화제는 외양은 거창하건만 아주 기본적인 단계에서 용서하기 어려운 실수를 저지르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인터넷 예매 시작 당일의 이런저런 해프닝은 이미 여러 차례 언급이 되었으니 넘어가기로 하고, 실제 영화제 기간에 벌어진 일을 되짚어 보자면,



 1. 이번 영화제에서 제가 가장 보고 싶었던 영화는 두기봉 감독의 〈탈명금〉과 미셸 아자나비시우스 감독의 〈아티스트〉였습니다. 시간표가 공개되자마자 살펴봤는데, 아뿔싸, 두 작품 모두 10월 8일 토요일 오후 6시 상영이 잡혔더군요. 둘을 비교해 보자면, 일단〈탈명금〉에는 두기봉 감독의 GV가 내정되었습니다. (예매 당시만 해도 엄청 좋을 줄 알았던) 영화의 전당 하늘연극장 상영작이기도 했고요. 한편 〈아티스트〉는 영화제 기간 중 단 한 번 그날에만 상영될 뿐만 아니라 역시 아자나비시우스 감독의 GV가 있었으며 오케스트라의 실황 연주를 곁들인 상영일 거라는 안내가 있었습니다. 엄청난 고민 끝에 저는 둘 중 약간 더 보고 싶었던 〈탈명금〉 쪽을 선택했습니다. 〈탈명금〉은 11일에도 상영이 잡혀 있었지만 일정상 그 시간에는 영화를 볼 수 없었거든요. 그랬는데…….


 2. 어느 순간 〈탈명금〉 8일 GV가 취소되고 11일 상영으로 옮겨졌습니다. 게스트 사정이라니 그거야 그러려니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상영시간표에 이런 사정이 반영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고, 오직 홈페이지의 공지사항 게시판에서만 변동사항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GV 취소 사실을 알았을 때는 물론 〈아티스트〉의 인터넷 예매는 매진된 뒤였습니다.


 3. 영화제 동안 각 상영관에는 그 날 해당 상영관에서 상영될 모든 영화의 시간과 부대행사를 기록한 화이트보드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매일 손으로 쓰고 지우는 식의 보드입니다. 8일 〈탈명금〉을 보기 위해 영화의 전당에 갔을 때, 그곳 화이트보드에는 떡 하니 〈탈명금〉에 GV 일정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걸 본 게 상영 시작 30분 전의 일입니다. 저는 당연히 취소된 GV가 다시 예정대로 열리는 줄 알았습니다.


 4. 상영관에 들어가고 영화가 시작되기 직전, 관객이 모두 자리에 앉은 가운데 앞에 나온 영화제 관계자가 게스트의 사정상 GV는 취소되었다고 알렸습니다.


 5. GV만 가지고 두 번 물 먹은 데에 슬슬 성질이 나려고 할 순간, 퇴장하던 관계자가 깜빡 잊었다는 듯이 다시 한 마디를 영어로만 덧붙입니다. 지금 상영할 영화에는 자막이 없고 표는 환불이 된답니다. 그걸 영어로만 말했는데, 알아들은 한국인 관객은 한국어 자막도 없는 건가 싶어 불안에 떨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인 관객은 그나마 낫습니다. 한 번도 안내되지 않았던 이 사항을 상영 직전에 알게 된 외국인 관객은 황망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상영관에서 우르르 퇴장해야했습니다.


 6. 하늘연극장은 영화의 전당에서 가장 좌석이 많아서 당연히 가장 크고 좋은 극장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전혀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영화제 때 외에는 영화 상영할 생각이 없는지 스크린 앞에 널찍하게 무대를 마련하는 바람에 스크린이 객석에서 상당히 멀어졌고, 그나마 크기도 별로 크지 않았습니다. 〈탈명금〉은 2.35:1 화면비의 영화였는데 스크린의 상하는 물론이고 좌우도 꽉 채워지지 않아 마치 와이드 TV에서 비 아나몰픽 레터박스 화면 DVD를 감상하는 기분이었습니다. 더구나 보는 중간중간 관객이 일어나 나갈 때마다 스크린에 관객의 그림자가 비쳤습니다.


 7. 영화가 끝나고 상영관을 나선 뒤에도 화이트보드에는 여전히 GV 표시가 선명했습니다.


 8. 그 화이트보드를 보고서야 깨달았는데, 〈아티스트〉는 〈탈명금〉과 동일한 오후 6시 상영이 아니라 8시 상영이었습니다! 〈탈명금〉은 7시 40분쯤 끝났으니까 예매만 했더라면, 아니, 당일 아침에 현장판매 표만 구했더라면 저도 볼 수 있었던 겁니다. 보는 순간 맥이 탁 풀렸습니다. 내가 18시와 20시를 혼동했단 말인가? 그런데 저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제 친구 중에는 저와 똑같은 고민을 하다가 〈탈명금〉을 포기하고 〈아티스트〉로 간 사람이 최소 두 명 더 있거든요. 영화제 측에 문의했더니 시간표를 실수로 그렇게 올렸는데 변동 이후의 시간은 카탈로그에만 반영이 됐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18시와 8시를 혼동한 건 제가 아니라 부산국제영화제였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10월 11일 오후 8시 38분 현재 부산국제영화제 홈페이지의 상영시간표를 보면 〈아티스트〉는 여전히 8일 18시 상영작으로 돼 있습니다.


 9. 어떻게 표를 구할 수 없을까 싶어서 〈아티스트〉가 상영된 야외 상영관 입구에서 한참 서성이다 목격한 겁니다: 야외 상영이었기 때문인지 지나가던 행인이 극장으로 들어가려는 일이 잦았습니다. 자원봉사자는 그때마다 표가 있어야 들어가실 수 있다고 안내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몇몇 행인은 매표소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자원봉사자는 처음에는 오늘 표는 매진되었다고 말하더니 나중에는 지쳤는지 매표소 위치만 가르쳐주고 표가 매진됐다는 이야기는 생략했습니다. 가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야외상영관 입구에서 매표소까지 가려면 영화의 전당을 반 바퀴를 돌아서 반대편으로 가야 합니다. 거기까지 찾아가고 난 다음에야 〈아티스트〉 표는 이미 매진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은 어떤 기분이었을지.


 10. 다음은 〈아티스트〉를 본 친구의 증언입니다. 시간표상에 안내된 GV는 알고 보니 아자나비시우스 감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고, 부산시장과 프랑스 대사관인지 어딘지 아무튼 그쪽 관계자가 상영 전에 와서 축사한 게 전부였다고 합니다.


 11. 더 어이없는 사실은, 무성영화인 〈아티스트〉는 오케스트라의 실황 연주와 함께 볼 수 있을 것처럼 소개됐건만, 오케스트라는 영화 상영 전에 영화랑은 아무런 상관도 없이 그냥 “공연”만 하고 끝이었다고 합니다. 실제 〈아티스트〉는 그냥 필름상의 사운드트랙으로 상영되었습니다.


 12. 9일에 독일 서부극 〈칭각국, 위대한 뱀〉을 보았습니다. (상영 제목은 “전사 위대한 뱀”입니다.) 눈대중으로 보니 1.66:1 정도의 화면비로 상영되었습니다. 처음엔 이상한 줄 몰랐습니다. 유럽 영화에는 곧잘 나오는 화면비니까요.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화면 구도가 너무 이상한 겁니다. 이건 영화를 만들 줄 모르는 사람이 만들었거나 아니면 화면이 잘렸구나 싶었습니다. 집에 와서 검색해 보니 영화의 오리지널 화면비는 2.35:1이라고 합니다. 전체 화면의 절반을 날려먹은 채 본 겁니다. 관계자는 아직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으리라는 데에 5백 원 겁니다. (혹시라도 하하, 알고 있거든요? 라고 하면 두들겨 패 줄 겁니다. 알면 해결을 하든가 안내를 해야지!)


 13. 9일에 또다시 영화의 전당 하늘연극장에 가서 〈무협〉을 보았습니다. 오후 5시 시작으로 예정되었던 영화가 진가신, 금성무, 탕웨이의 무대 인사 때문에 시작이 지연되었습니다.


 14. 〈무협〉 역시 GV가 예정돼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무대 인사가 GV의 전부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GV랑 무대 인사를 같다고 여긴 겁니까? Guest가 Visit 했으니까 GV라고 우길 겁니까?


 15. 또 한 번 어처구니없었던 점. 〈무협〉은 하늘연극장 2층에서 봤는데, 입장하려고 보니 출입구 바로 옆에 화이트보드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기술상의 문제 때문에 2층의 XX번부터 XX번까지 좌석은 앉을 수 없으니 표를 교환하랍니다. 직접 들어가서 보니 내막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영사실 앞쪽 좌석을 앉지 못하게 했어요. 그러니까 관객이 거기 앉았다가 상영 도중 일어나기라도 하면 프로젝터 빔이 가리는 겁니다. 〈탈명금〉 때 제가 본 관객 그림자가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대체 극장 설계를 어떻게 했으면 영화를 상영해 보고서야 ‘아, 이 자리에 관객이 앉으면 화면이 가릴 수 있구나.’라는 걸 깨닫게 되는 겁니까? 그리고 저는 다행히 좌석 하나 차이로 표를 안 바꿔도 됐습니다만, 상영 직전에 상영관에 도착했는데 그제야 안내문을 본 관객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하늘연극장의 2층 좌석 출입구에 이르려면 꽤 높은 계단을 오르거나 아니면 엘리베이터를 타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내려가서 표를 바꿔오라고요? 그나마 1층에서 바꿔줬으면 다행이겠는데 혹시 아예 영화의 전당을 나가서 광장에 있는 매표소에서 바꿔 와야 했던 건 아니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16. 11일 오늘 〈탈명금〉을 본 친구의 전언. 홈페이지 공지사항을 통해 이쪽으로 옮겼다고 하던 GV가 또 취소됐다고 합니다. 더구나 이번에는 아예 관계자가 양해를 구하지도 않았다네요.



 저는 한 영화제에서 이 정도 수준의 기본적인 문제점이 이토록 숱하게 발생한 경우를 본 적이 없습니다. 대게는 문제가 생겼으면 뒤늦게나마 수습하려는 노력이라도 보이는 게 도리일 터인데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수습하려는 의지가 별로 느껴지지도 않았습니다. 남은 영화제 기간에는 부디 정신 차리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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