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근처 공원의 그 사내

2020.03.18 15:02

어디로갈까 조회 수:999

회사 근처에 공원 -이라기 보다 작은 쉼터가 - 하나 있습니다. 한가운데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와  여러 꽃들이 오밀조밀 살고 있는  화단,  나무 벤치 몇 개가 놓여 있는 곳이에요. 
언젠가부터 느티나무 아래에  한 남자가 서 있습니다.  한 달 정도 된 것 같아요. 그는 하루도 어김없이 제 출근 시간보다 먼저, 저녁 퇴근 시간 때까지 꼬박 거기에 서 있습니다.  날이 춥든 흐리든 바람이 불든 눈발이 날리든 서 있어요. 나무 바로 아래 서 있을 때도 있고, 나무 벤치 뒤에 서 있을 때도 있어요.  날씨가 유난히 나쁜 날엔 가까운 건물 처마 밑으로 들어가 몸을 피할 때도 있긴 합니다. 

공원 근처에 지하철 역이 있는데, 그는 아마도 거기서 매일 밤 잠을 자는 거겠죠.  역은 낮에 통행자들이 많으니  아침이 되면 그는 공원으로 나와 마냥 서 있는 것이고요.  사람들이 저마다의 사무실로 향하 듯 아침마다 그 공원으로 출근하는 거죠. 어떤 날은 먹을거리와 음료수가 든 비닐 주머니를 손에 들고 있기도 하는데, 그럴 때는 늘 시무룩하게 아래로 처쳐 있던 그의 입술에 미소가 번져 있어요. 

그는 왜 거기에 서 있을까요? 그 사정을 제가 알 수는 없습니다. 가족도 없고 집도 없고 일자리도 없고 어쩌면 아예 사회인으로 살아갈 생각이 없는 사람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그는 그저 어딘가에 하염없이 서 있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도심의 작은 공원 나무 아래에 종일 서 있는 게 누구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아니니까요.

어떤 날은 혼자가 아니라 그의 주위에 누군가 둘러 서 있을 때도 있어요. 그 보다 더 남루해 보이는 외모로 상대가 알아을 수 없는 말을 떠들떠들 지껄이는 사내들입니다.  가끔 침낭 -처럼 보이는 것- 을 덮어쓰고 그의 옆에 누워 잠들어 있는 사람도 있어요.  벤치 위에다 신발과 생수통에 꽂은 칫솔을 올려두고 맨바닥에 잠들어 있죠. 그들은 며칠 눈에 띄다가 며칠은 모습을 보이지 않아요. 하지만 느티나무 아래 그 남자는 날이면 날마다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엔 우리 회사  경비실에서  그에게 항의했다고 해요.  "매일 여기 이렇게 서서 주변인들을 불편하게 하면 곤란합니다~ "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예"라고 순하게 답했으나, 그저 그뿐 변함 없이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요.
저는 그를 보면서, 그가 중국 우한의 모 극장에서 역할극을 하던 배우였는데 어쩌다 한국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 아닐까 라는 상상을 해봤습니다. 그러니까 연극 배우였던 그가 자신이 설 만한 무대가 더 이상 없자,  오갈 데 없어서 covid- 19 바이러스에 묻어 저 쉼터로 건너온 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그가 저렇게 우두커니 서 있지만 말고 뭔가 할 만한 일이 있는 곳으로 떠나주길 바라다면, 우린 그를 위해 무대 하나를 만들어줘야 하지 않을까요. 흠, 스티븐 소더버그의 <컨테이젼> 같은 스토리를 그의 낡은 모자 속에 넣어주면 어떨까요. - -;

이 글을 쓰면서 창밖을 바라보니, 그는 이미 죽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아, 어쩌면 그는 우한이 아니라 저 세상에서 온 죽음의 사자인지도 모르겠네요. 이 세상에 와서 우리들의 삶을 싸늘한 시선으로 관찰하라는 임무를 띠고 말이죠.  뭐 그가 작정만 하면 제 목숨쯤은 쉽게 끝나버릴 것 같긴 합니다.  그런데 길을 지나는 강아지를 쓰다듬어주고 어린 학생들에게 손인사를 건네는 모습을 보면, 그는 그저 새로운 땅을 찾아 이곳에 왔을 뿐이며, 다만 그곳이 우연히 회사 앞 작은 쉼터였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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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부터 우리 회사는 선택적 재택근무에 들어갔어요. 저는 업무 성격 상 출근하고 있고요. 오늘은 회사가 거의 텅 비었네요. 서류 하나 기다리면서 기웃거려보니 듀게 불이 꺼졌길래 자판질 톡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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