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오쿠 17권 (스포일러)

2020.02.19 08:05

waverly 조회 수:865

리디에서 오오쿠 17권 나온걸 보고 바로 질렀습니다. 번역하기 까다로운 작품이라 그런지 한국판이 늦게 출간되는 편이더라구요.번역판 기다리고 기다리다 못참고 일본판 주문해서 보면 사극체 말투랑 지역 방언까지 섞이는 바람에 줄거리 파악은 커녕 해독조차 힘들더이다 ㅠㅠ 후반으로 넘어가며 비슷한 패턴이라고 비판하는 독자들도 있지만 전 그저 작가님을 찬양할 뿐입니다. 성별이 바뀐 도쿠가와 가문 사람들 이야기인데 갈수록 인류학, 가족학(?) 리포트로 보이네요. 도쿠가와 막부 250년 역사와 역대 쇼군들의 이야기 속에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가족 형태와 관계 맺음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상상할 수 있는' 이란 말은 사실은 '존재했던' 이란 뜻이죠. 인류 역사에서 분명히 수없이 일어났고 현재진행형이기도 한 '폭력이 수반된 관계' 까지 말입니다. 14,15권에서 쇼군 이에사다는 심지어 아버지에게 주기적으로 성폭행을 당하고 어머니에게 독살당할 뻔했다는 어린 시절 묘사가 나왔죠. 실제 역사와는 전혀 무관한 이런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작가님의 암시가 무겁고 당혹스럽습니다만 그럼에도 인간을 바라보는 작가님의 시선은 기본적으로 단단한 믿음을 깔고 있습니다. 정치는 커녕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려도 이상하지 않을 이에사다가 먼저 사랑을 주는 법, 관계를 맺는 법을 아는 쇼군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거든요. 가신이자 친우인 아베와 사랑하는 남편 텐쇼인과 함께요. 


17권은 이에사다의 뒤를 이은 쇼군 이에모치가 주인공입니다. 대외적으로 천황의 남동생으로 위장하여 여성 쇼군 이에모치의 '남편'이 된  여성 카즈노미야가 쇼군 이에모치와의 관계를 튼튼하게 하기 위해 아이를 갖겠다, 라며 비밀을 아는 오오쿠 내 극소수의 남성들에게 "누가 나의 씨내리가 되겠는가 (...)" 라고 물으면서 끝납니다. 교토에서 양이파와 신선조가 허구헌날 칼부림을 해대는 하 수상한 시절이라 (바람의 검심 켄신의 '과거' 가 이 시대를 무대로 하죠) 여자 쇼군 이에모치는 정국 안정을 위해 교토에 몇번씩 가게 되는데요. 쇼군으로선 지난 200년 넘게 유래가 없던 일이죠. 그만큼 도쿠가와 쇼군의 권위가 떨어졌다는 방증이기도 하지만요. 여성이자 남편 역인 카즈노미야는 허구헌날 장기 출장 (...) 으로 집 에도성을 비우는 사랑하는 아내 이에모치를 집에 돌아오게 하는 동시에 정략 결혼의 원래 목적이었던 2세 생산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 방안으로 본인의 임신을 주장합니다. 본인 회임이 확인되자마자 쇼군의 회임이라 발표해서 쇼군을 에도로 돌아오게 하고 아이는 쇼군이 낳은 걸로 위장하면 된다는 이야기죠. 


실제 남성 쇼군 이에모치와 천황의 여동생 카즈노미야의 정략 결혼은 막부 말을 무대로 한 수많은 대하드라마와 영화에서 빠지지 않는 이벤트입니다.둘의 관계는 대체적으로 짧고 슬픈 로맨스로 그려지죠. 만화에서는 성별이 바뀌면서 몇가지 이야기가 덧붙여졌어요. (카즈노미야가 자진해서 남성으로 위장해서 온 이유는 남동생을 편애하는 어머니를 독점하기 위함이죠) 카즈노미야와 이에모치가 서로 마음을 열고 의지하는 관계가 되는 과정은 아름답습니다. 둘 사이는 그야말로 장애물밖에 없어요. 오오쿠 내의 그들의 침소를 제외하곤 카즈노미야는 쇼군의 '남편' 으로 존재하기에 항상 남자 복장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개항과 불평등조약으로 민심은 뒤숭숭하고 조슈와 사쓰마 등 지방 웅번들은 호시탐탐 도쿠가와를 뒤집어 엎을 궁리를 하며 쇼군의 후견 역할을 맡은 요시노부는 이들과 불화하죠. 교토의 고메이 천황 역시 우유부단하여 없느니보다 못한 존재로 그려지고요. 여성 쇼군 이에모치는 환란의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동분서주 하느라 사랑하는 '남편' 카즈노미야 곁에 있을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의 사랑은 장애물이 많을 수록 불붙기 쉽다던가요..? 


본격적인 퀴어물은 아닙니다. 육체 관계는 암시조차 나오지 않아요. 그렇지만 이들 둘이 침소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오락인 바둑을 두며 대화하는 모습은 왠만한 로맨스 저리가라 할 정도로 아름답고 절절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속 마음을 열고 의지하는 '부부' 로 연을 맺으려 할때 과연 무엇이 필요할까 돌아보게 됩니다. 결혼 전 연애요? 얼굴도 못보고 심지어 성별도 잘못 알고 정략결혼한 이에모치와 카즈노미야 사이에도 부부간의 정이 싹틉니다. 성관계와 2세생산이요? 사랑하는 이에모치를 집에 붙들어 두고자 임신을 결심하고 남자들을 향해  "누가 나와 동침하겠는가?" 라고 묻는 카즈노미야에게 있어 성관계와 부부관계, 2세 생산은 따로따로 돌아가도 별 상관없어요. 심지어 합리적이기 까지 한 결정이에요. 성공해서 입단속만 잘하면 어쨌든 대외적으로 이들은 고귀한 신분의 완벽한 이성 커플이자 2세 생산에 성공한 부부이며 이들의 아이는 천황가와 도쿠가와가의 결합을 상징하며 정치 혼란을 막을 수 있는 the one 이 될 수 있을 테니까요. 물론 실제 역사가 어떻게 돌아갔는지 아는 후대 독자 입장에선 안타깝기 그지 없지만요. 실제로는 냉정하고 잔혹하기 그지없던 시대를 이만큼 비틀어 놓고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  실존 자체는 긍정하며 믿음을 그려내는 작가님의 이야기를 동시대에 읽을 수 있어서 그저 행복할 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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