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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추석이랍시고 느지막히 일어나 어제 동네 반찬집에서 사다놓은 몇 점의 전을 데우고 있는데

   지난 그에게 문자가 왔네요. 

   -추석 잘 지내요

    

   이미 끝난 사이 치고는 참으로 다정한 음절이었죠.

   나는 너무 싫었어요.좋게 끝내질 못한 사이였거든요. 진심으로 연애했다면 좋게 끝날 수는 없는 법이라고는 생각하지만,

   그래도 이번엔 좀 심했던터라 화가 많이 났어요. 

   정말 안부인사였더라면 좋았을텐데...

   다른 여자와 잘 안되니까 나를 떠보는 연락이란 걸 잘 알고 있으니까, 전 대신 손을 구울뻔 했어요.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는 답을 보내면서도 그래도 다시 연락오는 게 좋을지도 몰라, 라는 한심한 생각을 했습니다.

   하긴 늘 이런 식이니까, 안부를 가장한 문자 따위가 오는 거라고요. 모두 제 탓이죠.


  

   -

   어렸을 적 부터 나에게 명절이란 외로움과 적적함을 동반한 단어였어요.

   친척도 많지 않고 그나마 왕래조차도 뜸한 집에서 자란 탓에 

   윷놀이 같은 건 해본 적이 없고 

   동생과 단둘이 미미인형 놀이나 딱딱한 커버의 동화책으로 집짓기 놀이를 하며 보내곤 했어요.

   가끔 예쁜 옷 입고 먼 친척 집에가서 절하면 돈을 주니까, 그건 재밌었던 것 같아요.

   그에게 이런 얘길 하면, 우리 집은 제사도 많고 종가인데 너는 오면 죽어나겠다, 뭐 이런 소릴 하곤 했죠.

   이별통보를 당한 이유 중 한가지도 그거였어요.



  

   -

   하긴, 나도 안부를 가장한 그런 문자를 보낸 일이 있었죠. 추석은 아니었고 크리스마스였어요.

   옆 얼굴이 근사한 사람이었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길고 새카만 머리카락을 가졌었어요. 바람이 불면 흑단 향 같은 것이

   날 것만 같은,

   실은 헤어진 남자친구의 친구였는데, 마치 쥴앤짐이나 몽상가들의 그들처럼 셋이 붙어다니던 친한 사이였어요. 

   어쩌다 큰 싸움 이후로 나는 물론 그 역시 남자친구와 연락을 끊어버리게 되고, 오히려 그와 내가 드문 연락을 하곤 했죠.   

   11월의 어느 날 우연히 헌 책방에서 책을 고르고 있는데 그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니겠어요. 

   뒤를 돌아다보니 긴 머리카락이 목덜미에서 댕강 잘려있어 깜짝 놀랐죠. 나는 어쩐 일이예요? 가 아니라

   어떻게 된거예요? 라고 물을 수 밖에 없었어요.

   둘 다 책을 너무 많이 사버려서 택시를 함께 타고 이동하는 데, 마침 진눈깨비가 흩날리기도 했고 주말이라 차가 많이 막혔어요.

   실은 걸으면 10분 정도의 아주 짧은 거리였는데.

   라디오에서는 빙크로스비의 이른 캐롤이 흐르고, 나는 차가 더 막혔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빌었죠.

   그는 넉살좋게 아저씨와 대화를 주고 받았고 그저 듣고만 있는데도 즐거웠어요. 사이 사이 그는 나의 안부를 물었지만,  

   나는 이전 남자친구와 종종 다시 연락한다는 말을 솔직하게 할 순 없었어요. 

   

   한동안 그와 나는 굉장히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요. 그는 친구들과의 모임에 매주 나를 데려갔는데, 나는 간식 따위를 준비해서 옆에서

   그들의 이야길 가만히 듣고.

   그러다가 사이가 틀어진 건 나의 거짓말 때문이었어요. 이전 남자친구와 내가 다시 연락한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일종의

   배신처럼 느껴졌던 모양이었어요. 그런게 아니었는데, 그에게는 그런 거였던 거죠.

   

   나의 어떤 연락도 받지 않는 그에게, 크리스마스를 빌미로 해 문자를 보냈습니다.

   -즐거운 크리스마스와 연말 보내길 바래요.

   아무 감정이 없는 척 했지만, 실은 그럴수가 없었죠. 

   한참 후, XX씨도요, 라는 답이 오긴 했지만,

   그걸로 끝이었어요. 그래도 고마웠어요. 마지막 말을 들을 수 있어서.

    

   


   -

   그냥 가을이 되면 이 노래가 꼭 한 번은 생각나요.

   마치 덮어둔 기억들이 떠오르는 것처럼


   

   +가영님을 위해 곁들이는 가사 해석





     A la faveur de l'automne 가을이라서


    - by Tete



   Posté devant la fenêtre  창문 앞에 붙어 서서

   Je guette Les âmes esseulées 고독한 영혼들을 살펴봐요

   A la faveur de l'automne 가을이니까요


   Posté devant la fenêtre 창문 앞에 붙어 서서

   Je regrette De n'y avoir songé 나는 깊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후회해요

   Maintenant que tu abandonnes 당신이 나를 버린 지금에서야


   A la faveur de l'automne 가을이니까

   Revient cette douce mélancolie 이 부드러운 멜랑콜리도 다시 날 찾아와요


   Un, deux, trois, quatre 하나, 둘, 셋, 넷

   Un peu comme on fredonne  De vieilles mélodies 마치 오래된 멜로디를 콧노래로 흥얼거리듯


   Rivé devant le téléphone J'attends 전화기 앞에서 난 기다려요

   Que tu daignes m'appeler 당신이 나를 부르기를

   Que tu te décides enfin 당신이 끝을 결정해주기를


   Toi, tes allures de garçonne 당신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내게 왔고

   Rompiez un peu la monotonie De mes journées de mes nuits 내 밤과 낮의 무료함을 달래주었죠


   A la faveur de l'automne 가을이라서 

   Tu redonnes A ma mélancolie Ses couleurs de super-scopitone 내 멜랑콜리는 당신으로 인해 화려한 색채를 입어요

   A la faveur de l'automne 가을이라서


   Comment ai-je pu Seulement être aussi bête ? 난 어쩜 이렇게 바보였을 수 있죠

   On m'avait prévenu 모두가 나에게 경고했는데...

   Voici la vérité nue 자 여기 자명한 진실이 있어요

   Manquerait Plus que le mauvais temps 불행한 시간들 뿐이었지만,

   S'y mette, Une goutte de pluie et 빗방울이 하나 내리기 시작한다면

   J'aurais vraiment tout perdu 난 정말 모든 걸 잊을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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