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23 14:43
원래 로그인을 잘 안(못)하는 편인데 로그인을 하게 된 김에
별 얘기도 아닌 글 하나 남기고 갑니다...
방금 주방 옆 베란다에 가서 뭔가 잡일을 하려는데
선반에 걸어둔 채소 바구니(요즘 많이들 쓰고 메는 네트백에 신문지를 넣고 그 속에 감자나 양파 따위를 넣어 둡니다)에
비주룩한 녹색 발톱 같은 게 보였어요.
녹색 채소 넣어두는 곳이 아니라 놀라서 다시 보니 양파에서 싹이 자랐더군요.
원래 채소를 소량으로, 1-2개 정도만 넣어 보관하는 편인데
양파를 한동안 요리에 많이 쓰지 않았더니 보관기간이 길어지며 싹이 자란 거였어요.
왜 싹이라는 건, 식물의 싹이라는 건 희망의 대명사마냥 쓰이는데
먹는 채소에서 난 싹은 이처럼 생경하게 느껴질까요?
나와서는 안 되는 것, 반기지 않는 종류에 속하듯요.
봄을 맞아 날이 따뜻해지니 양파 싹도 더 빨리 자라는 것 같습니다.
개나리도 버들강아지도 싹이 나고 봉오리가 맺힌 모습을 보면 순간 왠지 기쁜데
감자나 양파에서 난 싹은 '거슬려요'(더군다나 감자 싹은 독 때문에 없애야 하는 종류의 것에 속하죠).
사실 오늘 본 양파 싹은 조금 징그럽게까지 느껴졌어요. 양파 싹을 처음 본 것도 아닌데도요.
어릴 때부터 다소 늦된 데가 있었던 아이에게
메타인지라고 해야 할 만한 부분일지, 아무튼 일률적인 기준을 들이대지 않고 상황에 따라 다르게 판별해야 한다는 점을
생활 속에서 틈틈이 가르치려 합니다(보통 좀 빠른 아이들은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익히는 듯한데
제 아이는 이런 부분에서는 응용이 조금 더딥니다. 이런 부분은 일반적인 학습을 하는 것과는 또 다른 기제인 것 같은데,
사람 뇌의 성장 발달이란 국어 수학에만 있는 게 아니라 뇌 안에서 수많은 요소가 정교하게 작동하며 사고를 키워가는 것이란 걸
아이를 키우고서야 알게 되었네요.)
그런데 문득 오늘 채소의 싹을 보면서, 저부터도 상황에 따른 판별이나 그에 대한 순응 같은 건 제쳐 두고
문득 왜 같은 모습으로 태어나도 이처럼 인식되는 것은 다 다를까, 뻔히 아는 것에 대한 새삼스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점을 역이용해 많은 것들이 세상에 득으로 바꾸어졌음을 알지만, 사고하며 세상을 사는 게 가끔씩 피곤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세상의 많은 일들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의심하고, 알아보며 살아가는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요즘 부쩍 늙었다며 한탄하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곁에서 이러구러 들으면서
저의 늙을 일에 대해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버스를 탈 때, 스마트폰으로 버스 앱을 검색해서
그리 기다리지 않아도 될 시간에 맞추어 버스를 타러 나가지요.
전에 어머니가 너는 어쩌면 그렇게 딱 맞추어 버스를 타느냐며 감탄하듯 하신 적이 있어, 앱을 알려드렸고 어머니도 요즘은 꽤 이용을 하십니다.
그렇지만 한 장소에 대한 효율적인 버스 환승 코스는 역시 제가 짜서 알려드려야 합니다. 제 어머니가 요즘 기준으로는 그렇게 노년도 아닌데도 그렇습니다.
몇십 년 뒤에 저도 제 아이나, 또래의 젊은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보며
부러워 하기도 하고 따라갈 수 없겠다 체념도 하겠지요.
인간이 세상의 변화 속도에 맞추어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는지도 모르는데-노년이 되면 일단 변화에 발맞출 신체적 정신적 에너지부터 딸리지요-
세상은 변화를 미덕으로 안다는 점이, 때로 버겁고 두렵게 느껴집니다.
...이야기가 여기서 저-기로 확 뛰어 버렸네요....
2020.03.23 17:12
2020.03.24 14:00
그러게요 인간이란 동물은 복잡해요. 게다가 동물임에도 동물과는 달라야 한다는 관념때문에 더 피곤하죠...그런데 뇌가 정말 그런가요?신기하네요...
2020.03.23 17:49
양파싹이 나면 양파가 뭉그러지는게 사람같이 느껴져(애낳고 쭈글해져버린 엄마) 마음이 아파요.
양파싹을 못먹는줄아는 분도 계시던데 먹을수 있습니다. 저도 시엄니한테 배웠어요.
2020.03.24 14:05
아 저 채찬님 댓글 읽고 뭔가 둥-했어요. 양파 싹을 보고 또 완전히 다르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거...원래 한가지 가지고도 세상 많은 사람 수만큼 다양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건 알았는데 한동안 그런 감각이 굳었었는지, 뭉그러지는 것을 자식에 애쓰며 자신은 조금씩 삭아져 가는 어머니로 보인다는 말씀에 뭔가 뭉클하기도 하고요...
푸른 싹도 먹을 수 있는 건가요 아니면 싹을 베고 싹 자랐던 양파만 먹을 수 있는 건가요? 무튼 저도 덕분에 새로운 사실 배웠네요.
2020.03.23 18:34
2020.03.24 14:06
저도 오늘 오랜만에 고기 재는데 이 싹자란 양파를 이용할 거 같네요...어제 싹난 녀석을 보며 '쟤부터 빨리 먹어치워야겠다' 생각했어요. 아주 조금 떨더름하긴 하겠지만, 단도리해서 자르면 다 같은 양파겠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