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24 01:28
도서관_
이번 주 일요일에 개관했던 도서관들이 주말이 되기 전에 다시 휴관했습니다. 연장하지 않으면 2주, 연장하더라도 보통 1달이 최대인 대출 도서들이 한 달을 넘어가도록 집에 있어요. 보통 2주 단위로 도서관들을 순회하며 책갈이를 해왔기 때문에, 답답해서 숨이 막힙니다. 이번에는 세 개의 권역, 7개의 도서관에서 휴관 문자를 보내왔으니 전보다 상황이 훨씬 안 좋아진 것이겠지요. 3월 둘째 주에 개관한다고들 하는데, 그 때 쯤 도서관에서 책을 다시 빌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영화관_
근 두 달 정도 영화관을 타의에 의해 못 가다가, 연일 영화를 봤습니다. [솔직한 후보]와 [작은 아씨들]이었는데,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영화관은 매우 휑하더군요. 오랜만에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니 영화관이 제공하는 공간감과 음향이 절실하게 느껴지긴 하되 죄를 짓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행위들이 윤리적으로 비난을 받을만하거나 법적으로 문제가 되거나 도덕적으로 죄를 짓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말이지요.
코로나19_
위와 같이 활동하고 나면 꼭 내가 확진자가 된다면 얼마나 비난을 받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다이어리에 꼬박꼬박 하루 했던 일들을 적당히 기록하는데, 하루 하루 지날 때마다 2주 단위 가상의 자를 들이대는 기분이 듭니다. 어차피 평일은 회사와 집을 오가는 것 뿐이고, 주말에 피치 못하거나 피치 않은 이동들을 하게 되는데 그 일들이 평상과 달리 새롭게 해석되겠죠. 다다음주 정도 되면 회사를 다니는 것 외에는 자가격리 급의 이동을 보일 터라 2주가 차라리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미워하기 혹은 애정하기_
예전부터 생각하는 것인데, 저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애정과 미움을 깊게 가지는게 어렵습니다. 한국에서 공감하는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사실 외국에 살아본 적도 없지만) 누군가 혹은 누군가들을 함께 깊이 애정하거나 미워해야 하는데 그게 잘 되지 않습니다. 가끔 그런 부분에서 제 자신에게 이상성이나 비사회성을 느낍니다. 누군가를 강렬하게 미워하거나 애정할 만큼 관심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그러려고 하면 많은 숙고가 필요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런 대화 사이에 있을 때 불편함을 느끼거나 침묵하게 됩니다.
가끔은 되묻기도 합니다. '이러 이러한 부분을 고려한다면 그런 감정을 가지기 힘들게 되는게 아닌가?' 그런데 그런 질문을 하면 대화의 흐름이 어색해져버리기 때문에 곧 잘 그만두거나 얼버무리게 됩니다.
다만 미움과 애정으로 감정을 한정한 이유는, 마음이 흔들리는 경험을 갈수록 자주하기 때문일 겁니다. 갈수록 영화를 보면서 감정을 똑바로 바라보기 힘든 영역에서 계속 울게 됩니다. [솔직한 후보]와 [작은 아씨들]을, [윤희에게]와 [결혼 이야기]를, 심지어는 [버즈 오브 프레이]를 보면서도 마음을 흔드는 장면 장면들이 있고 감정이 북받치게 됩니다. 이는 슬픔과 놀라움이라고 할까요. 정확히 뭐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젠 그런 감정들은 사적인 것이고, 딱히 정리하거나 토로하지는 않아요. 제 것으로 남겨놓는건가 봅니다.
연대_
애인이 동성만이 참여 가능한 독서모임에 참여하여, 그 시간 동안 근처 책방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한 달간 매 주 하루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서 꽤 책을 읽었지만, 저에게도 뭔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언젠가 야간 막차를 타고 집에 가다가, 어떤 할머님이 내릴 정류장을 놓치고 기사님을 부르셔서 중간에 내렸는데, 그 때 내리면서 연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를 읊조렸던게 매우 마음에 남았습니다. 그건 마치 세상에는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 그 문제의 원인이 남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확실하게 나뉘겠구나 싶었습니다. 말하자면 사고의 요체에 죄책감이냐 뻔뻔함이냐라고 물을 수 있다고 할까요.
죄책감에는 메타인지가 따라오고, 뻔뻔함은 자신감을 끼워팝니다. 연대를 생각할 때, 다급하거나 박해를 받아오지 않았다면 연대해보자는 말을 꺼내는 것에 죄책감을 가져야 할 지, 아니면 무거운 감정이 없더라도 뻔뻔하게 상상을 해봐야 할 지 고민되는 위치입니다. 위의 주제에서 언급했듯, 무언가를 미워하거나 애정하지 않고도 연대를 상상할 수 있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연대라고 한다면, 느슨하게 살기 위한 연대입니다.
이 이후로 글이 써지지 않기 때문에, 마무리를 지어요. 느슨하게 사는게 도대체 뭘까 하면, 바낭과 같지 않나 싶습니다. 바낭도 이제는 SF처럼, SF가 Science Fiction이 아닌 만큼이나 바낭도 바이트 낭비의 줄인말이 아닌 것처럼 그런 것 같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자 봐야겠네요.
2020.02.24 02:28
2020.02.24 22:35
많은 감정들이 그렇듯, 두려움을 갖는 것은 논리적이되 비이성적입니다. 최근에 공포를 이야기할 때 왜 공포를 가지느냐는 거의 묻지 않고, 공포로 어떻느냐는 이야기를 주로 나누기에 낯설은 감이 있네요. 저의 공포가 충분히 비이성적이라는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게 어디 가거나 하지는 않아요.
많은 부분에서 ssoboo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비난은 존재의의가 있고, 또 계속 존재할 겁니다. 무엇보다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비난하지 말라는 비난을 하면 자가당착이잖아요. 다만 누군가를 비난할 권리가 어떤 기준을 통해 획득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기간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길어질 것처럼 보이는데, 힘드시지 않고 모쪼록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저도 실재 세상에서 평안하기를 노력할겁니다.
2020.02.24 03:40
2020.02.24 22:37
여성 승객과 남성 운전사로는 생각해보진 못 했습니다. 한 단계 더 발견하게 되었네요.
2020.02.24 10:32
글 좋아요.
마음을 흔들리는 경험을 일상에서 자주 하신다는 것은 늙었다는 의미일것 같아요.(죄송...)
갈수록 자주하신다는 것도,,,,,
좋은 의미를 부여한다면, 공감능력이 갈수록 좋아진다는 의미이기도 하겠죠.
저도 서시의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2020.02.24 22:38
하하, 전에도 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변해가는 걸 느낀다고 하니까 '나이 드셨네요' 하시더라구요.
제게 별로 싫은 말은 아닙니다.
2020.02.24 11:58
2020.02.24 22:39
아무리 로컬 영화제라지만 노미네이트 된 영화들이 궁금하더랍니다.
2020.02.24 14:25
내외적으로 갇혀 지내는 상황, 생각마저 그 범위가 좁아지는 나날 속에서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글을 읽어서 기뻐요.
저 역시도 어딜 가고 싶지만 훗날 그것이 누군가에게 동선으로서 읽힐지 모른다 생각하면 지레 행동력도 기운도 잃게 됩니다.
사실 병도 병인데 이같은 상황으로 인해 장사 안 될 수많은 곳곳들을 생각하면 '그나마 덜 위험군(주변 지역에 아직 확진자가 없어요)'에 사는 저라도
조심조심 돌아다녀줘야 하는 거 아닐까 하는 웃긴 생각(하지만 나름 진지해요) 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새가슴이라, 돌아다니다 온 밤 건조한 실내 때문에 잔기침이라도 좀 하면 그때부터 오만 생각을 다 할 저 자신을 알기에...
죄책감에는 메타인지가 따라오고, 뻔뻔함은 자신감을 끼워팝니다. <--이 부분 밑줄 긋고 싶어요.
막연히 생각으로만 제 머릿속에 떠돌던 것들을 이렇게 간결하면서도 와 닿도록 표현하는 분들을 보면 기쁘기도 하고 부러워요.
2020.02.24 22:40
살금살금 걷느라 진이 빠지는 매일 매일입니다. 그냥 사는 것도 힘든데 한꺼풀 더 얹자니 피곤하죠.
글 재미있게 읽어 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왜 비난 받을거라 생각하세요? 31번도 그렇지만 대게 확진자가 비난을 받는 경우는 검진을 거부하거나 이미 확진자와 접촉자로 자가 격리해야 하는데 어기고 다중 이용시설을 가거나 다른 사람들과 식사를 하는 행위를 하는 사람들 아닌가요?
그리고 코로나 초기에 중국 우한 등에서 입국하여 감염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역시 부주의한 행동을 아주 광범위하게 한 케이스 였어요.
물론, 확진자에 대한 비난과 혐오는 방역에 전혀 도움이 안됩니다. 그런 사회 분위기에서는 의심 증상이 있는 사람들이 숨어 버리게 되는 경우가 생기니까요.
비난을 옹호 하는 것이 아니라 잔인한 오후님 본인이 비난을 걱정하는 케이스가 너무 생뚱 맞아서 그래요. 그
생뚱 맞음을 통해 뭔가 사실 인식에 오류 혹은 현실과 괴리된 관념의 과잉에 따른 오바가 감지 되어 말씀 드립니다.
저 같은 경우는 막연한 생각이 아니라 현실이었어요. 상해에서 귀국하던날 출발 당시에는 상해에서 확진자가 나오기 전이었고
국내에서도 아직 환자가 나오기 전이었어요. 그래서 귀국해 이 삼일 정도 원래 예정된 일정을 소화했는데 나와 같은 날 우한에서 상해를 경유하여
입국한 남성이 확진 판정을 받고 나서부터 지난 한달간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고 있어요. 말씀 하신 비난을 당할 걱정이 아니라, 혹시라도 내가 감염이 된거라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게 되는 것일까 하는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에 대한 죄책감이죠.
실제 14일간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스스로 자가격리를 해버렸어요. 이미 잠복기도 한 참 지났지만 여전히 부담감이 따라 붙어요.
저 뿐만 아니라 상해에서 연락을 유지하며 가끔 보던 지인들 모두 설을 맞아 국내로 들어와서 다들 알아서 자가 격리를 했더군요.
그런 사람들 입장에서 볼때 몇몇 무책임한 케이스를 보고 혀를 찰 수 밖에 없지 않겠어요?
게다가 나는 현재 또 한국을 떠나 제3국에 들어와 있고 오는 동안 출발지와 경유지 포함 총 3개의 공항을 거쳐 왔어요.
까놓고 말해 내일부터 진행될 일정에서 현지 파트너들이 나와의 미팅을 보이콧 하더라도 할 말이 없는 처지입니다.
지금 한국 역시 위태로운 상태니까요.
일주일 사이에 500명이 넘는 환자가 새로 발생한 나라에서 온 사람의 여권을 맨손으로 받고 보딩체크인 해주고
호텔 카운터에서 나의 바우처와 여권을 또 맨손으로 받아주고 키카드를 내주던 분, 피니쉬한 접시를 치워주던 사람들의
얼굴도 아마 다시 또 이 주 넘게 절 짓누르게 될거에요.
예정된 일정을 다 소화 하고 다시 귀국을 하더라도 한 일주일간은 여기서 만났던 사람들의 안위가 걱정되고 불안하여 또 다시 불면의 밤을 보내게 될거에요.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재하는 세상은 이렇습니다.
사변적이고 관념적인 나이브함은 이기심 혹은 지나친 에고의 오랜 벗입니다.
사람들이 31번 환자를 비롯해 몇몇 케이스에 분노하는 이유는 그들이 확진 판정을 받기 전에 다닌 행적 떄문이 아니에요.
자신이 의도를 했건 안했건 결국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조심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걷어 차거나 인지상정의 미안함,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는 행동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31번 환자를 통해 감염된 사람들이 매우 많은데도 역학조사에 매우 비협조적이고 거짓말을 많이 했어요.
이건 일반인의 상식으로 납득이 안되는 행위입니다. 아무리 환자에 대한 비난을 삼가하는 것이 전염병을 통제 하는데 필요하다고 하지만
인지상정은 어쩔 수가 없지요. 그런 인지상정이 공동체를 유지하는 버팀 목이 되기도 해요. 일종의 사회적 금기를 형성하는 동력이 되죠.
물론 그런 금기는 세상이 변하면서 따라서 변질되거나 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은 아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