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의 수상소감

2020.02.11 11:13

Sonny 조회 수:2644

짤린 영상으로만 해당 부분을 봤는데요. 봉준호의 작품상 수상소감은 굉장히 재미있었습니다. 그에 대한 미국인들의 반응이 또 웃겼구요. 아무리 패기와 자신감을 사랑한다 해도 사람들은 결국 그런 사람조차 객석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위해 고개를 숙일 줄 아는, 겸허한 사람을 사랑하는 거죠. 


대충 요약하면 이 수상소감의 시작은 봉준호가 아카데미 시상식을 두고 로컬 영화제라고 농을 친 부분부터일 겁니다. 영화계에는 흔히 두 개의 시상식이 있잖아요, 아트 영화, 대중 영화. 아트 영화 축제의 끝판왕은 깐느이고 대중 영화 축제의 끝판왕은 아카데미입니다. 아주 러프하게 나눈다면 그렇다는거죠. 미국영화인들의 축제지만 사실상 대중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것은 미국의 헐리웃이니까. 이 두개의 판을 두고 깐느를 정복해버린 아시안 감독이 하나 등장합니다. 미국인들은 슬슬 이 아시안 감독의 영화에 열광하고 있었구요. 아카데미 시상식에 왜 한국영화가 후보로 오르지 못하냐는 질문에 봉준호는 이렇게 대답해버렸습니다. 그거 로컬 영화제인데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지. 안그래도 대중성과 작품성 평가에서 갈 수록 그들만의 잔치로 전락한다는 비판에 시달리던 아카데미를 아주 멋지게 먹인 한방이었습니다. 황금종려잎을 머리에 두르고 있는 자가 자기네 축제를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데 어찌 버튼이 안눌릴 수 있겠어요. 아카데미는 이미 이 도전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피하는 순간 다시 그들만의 잔치로 격이 떨어지니까요. 


그 다음 영국에서 봉준호는 1인치의 자막만 넘어가면 멋진 영화들이 있다며 소감을 말합니다. 그래봐야 지들끼리, 다른 어딘가에서는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서로 보는 눈이 있다며 포옹, 그래서 아카데미에서의 파격적 수상은 차근차근 명분을 쌓아나간 것 같은 느낌이 있습니다. 깐느에서도 인정받았고, 영국에서도, 골든글로브에서도 인정받은 나를 아카데미 너희는 어떻게 평가할건데? 또 꼰대로 전락할거냐? 분위기가 아주 요상하게 돌아갔죠. 미국인들도 자기네들의 위선에 질려가는 마당에 이 아시아의 풍운아가 일으킨 파란이 너무나 즐거웠고.


우리의 포부를 보여주마! 윈윈 아니면 루즈루즈만 있던 이 양자택일에서 아카데미는 아주 대범하게도 연기상을 제외한 알짜배기 상들을 다 기생충에 몰아줬습니다. 그런데 그게 또 이상하지 않았던 게 경쟁작들이 심하게 미국, 백인, 남자 같은 이야기였기 때문이죠. 좋은 작품이지만 결국 아카데미 풀 안에 있는 범작들이라고 할까요. 아카데미는 오히려 <기생충>의 명성에 기생한 것 같기도 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고인 물이어도 너 같은 변종천재를 알아볼 눈은 있다! 이변은 이변이지만 작품 자체로 놓고보면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초이스였습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합리적 판단이기도 했구요.


자, 이제 이 갑툭튀 아시안 감독에게 아카데미가 자신들의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그렇다면 뻔한 감사와 우리 (한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의 영화들도 사랑해달라 같은 말들이 이어질 차례이죠. 그런데 여기서 봉준호가 그 공을 미국영화에 돌려버렸습니다. 나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라는 말을 되새기며 영화를 공부했다, 그리고 그 말을 한 것은... 여기 우리의 위대한, 마틴 스콜세지다. 아카데미를 부정하고 결국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만들었던 외부인이, 그 공을 미국영화에 다시 돌린 것입니다. 어찌 미국인들이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미국영화와는 뭔가 이질적이고 너무 한국스러운, 비미국스러운 이 이상한 영화를 기꺼이 "세계인"으로서 인정해줬는데 여기서 그가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격상시켜줬으니 말이죠. 아메리칸 시네마의 전설이자 아버지, 미국인들이 미국영화에 품고 있는 자존심의 유일하다싶이한 증거를 그가 직접 언급해주는데 미국인들이 미국적 자부심을 지킬 수 있던 건 당연하죠. 그래 고맙다 짜식...!! 우리 미국영화, 스콜세지를 또 말해줘서!! 아무리 봐도 기립박수 칠 타이밍이나 맥락이 아닌데 미국인들이 기립박수를 마틴 스콜세지한테 보내고 있더라고요 ㅋㅋ 마틴 스콜세지가 <기생충>을 찍거나 봉준호를 가르친 것처럼 ㅋㅋ


미국영화에 대한 도전은 돌고 돌아 미국영화에 대한 은혜와 축복을 간증하는 자리로 모두에게 훈훈히 마무리되었다는 결말입니다... 전 이게 좀 웃기면서도 봉준호의 비즈니스적 지혜라고 해야하나, 그런 거에 좀 놀랐습니다. 인터뷰들이 아주 적절하게 사람들을 건드리는데, 그게 또 어쩔 수 없는 사실이면서 뭔가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도발적인 예리함이 숨어있다고 해야하나요. 그리고 마지막에는 나를 인정해줘서 고마워, 그런데 나는 너희에게 사사받았던 사람이야 하며 감동의 포옹 ㅋ 당연히 립서비스뿐은 아니겠고 존경하던 거장에게 감사를 표하는 성공한 덕후의 가장 멋진 순간이기도 할 겁니다. 그럼에도 이 파격적 드라마가 위 러브 유, 논어메리칸 시네마. 아이 러브 유 투, 어메리칸 시네마로 마무리되는 걸 보면 역시 겸양과 존경이야말로 사람 혹은 행사를 가장 멋지게 만들어주는 게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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