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려오는 파도소리에

2010.12.17 22:49

차가운 달 조회 수:1727

 

 

 

제가 아주 어릴 때 들었던 노래가 있어요.

어릴 때, 아주 어릴 때, 일곱 살인지 여덟 살인지, 학교엘 들어갔는지 안 들어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고, 어쩌면 열 살이나 열한 살일 수도 있고,

제가 붙잡고 있는 그 기억을 제외한 다른 모든 기억은 시간의 순서가 끊어진 채 다만 흐릿할 뿐이죠.

 

누군가 노래를 불러줬어요.

밤이었는지 낮이었는지 그런 것도 기억나지 않고,

그곳이 집이었는지 집이 아니었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아마도 밤이었던 것 같아요. 주위가 어두웠거든요.

어쩌면 간밤의 꿈이나 눈을 감고 있을 때 잠시 떠오른 영상처럼 그 기억을 담고 있는 제 머릿속의 어둠 때문인지도 모르죠.

노래를 불렀던 사람이 남자였다는 것은 알아요.

남자였고, 어쩌면 그 사람은 제가 아는 나이 많은 형이거나 이른 아침 신설동 버스정류장에서 천 원짜리 한 장을 빌려 달라던 사람, 사람 많은 신촌 거리를 걷다가 어깨를 부딪힌 여자, 대구 제일극장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며 오늘 산 옷이 잘 어울리는지 물어본 남자처럼 잠시 제 앞에 나타났다 영원히 사라져 버린 그런 사람일 수도 있죠.

 

기억이 아주 흐릿해요.

누워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누워 있었고 그 사람은 노래를 불렀죠.

잘 모르겠어요, 제가 그렇게 기억하고 싶은 것일 수도 있어요.

누워 있었다고, 어둠 속에 누워 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그리고 노랫소리가 들렸다고, 하지만 그건 전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죠.

 

그때의 기억을 좀 더 자세히 떠올리려 집중을 해보기도 했어요.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그 노래를 들었던 순간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어요.

하지만 기억을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그때의 기억은 떠오르지 않고 그저 고등학교 때 교생 실습을 나와서 김현식의 '사랑했어요'를 불렀던 남자 교생이나 열살 무렵 방학 동안 딱 한 달 다녔던 미술학원에서 그림을 그리다 라디오에서 들었던 노래, 누가 불렀는지도 모르고 그저 제목이 '모모'라는 것만 아는 노래, 날개 위에 산을 얹고 날아가는 비행기 그림을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모모는 철부지' 하고 그 노래를 따라부르며 걸었던 그런 기억만 떠오르는 거예요.

 

집이었는지 집이 아니었는지도 잘 모르겠고 방이었는지 다른 어떤 곳이었는지 누워 있었는지 주위가 어두웠는지 아무 것도 알 수 없는데

어떤 남자가, 그 남자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노래를 불러주던 순간만 기억에 남아 있어요.

 

밀려오는 그 파도소리에 밤잠을 깨우고 돌아누웠나

 

그렇게 딱 한 번 들은 노래였는데도 그 노래는 참 오랫동안 제 머릿속에 남아 있었단 말이죠.

제목도 가사도 아무 것도 몰랐어요, 제가 정확히 기억하는 것은 '밀려오는 그 파도소리에' 그 부분뿐이었으니까요.

 

불을 끄고 누워 잠들기 전이면 가끔 그 노래가 떠올랐죠.

밀려오는 그 파도소리에...

그 노랫가락은 정말 어둠 속에 누워서 듣는 파도소리처럼 머릿속의 해변에서 천천히 밀려왔다 밀려가곤 했어요.

잊혀지지도 않았어요,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그 노랫가락은 잊혀지지 않았어요. 그렇게 오래 잊혀지지 않는 노래라니...

나중에 어른이 되고 나서야 그 노래가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인지 금상인지 아무튼 대학가요제에 나왔던 노래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죠.

 

이건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얘긴데, 그냥 어릴 때 누군가가 불러주는 어떤 노래를 들었다는 얘기뿐인데...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 있어요, 물론 저한테만 있는 느낌이죠, 설명할 수 없어요, 그걸 전달할 수 없어요.

어릴 때, 아주 어릴 때 누군가가 이 노래를 불러줬단 말이죠.

저는 지금도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가끔 그 노랫가락을 들어요, 어둠 속에서 퍼져나가는 파도소리를 들어요, 그런데 돌아눕는다는 노랫말, 저는 왜 꼭 그 부분에서 기분이 이상해지는지 모르겠어요.

 

유튜브에는 참 별게 다 있단 말이에요. 저도 며칠 전에야 이 동영상을 봤어요.

처음 봤죠, 사실 전 이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들은 적도 별로 없어요.

재미있더라구요, 그때의 영상이 남아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저때는 대학생이 참 어른스러웠어요. 이상하죠? 지금 대학생은 애들 같은데.

 

문득 잠을 깨고 돌아누워 밀려오는 파도소리를 듣는 사람...

어떻게 이런 가사를 쓸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34922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54249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64689
111740 크리스마스 장도리 [8] 작은가방 2012.12.24 3880
111739 '왓비컴즈' 특정 '기획사'의 네거티브 알바설? [6] soboo 2010.08.28 3880
111738 악마를 보았다는 추격자의 허세버전 같아요...(스포無) [4] 윤보현 2010.08.12 3880
111737 개콘 황해 코너 불편하지 않나요? [15] 세멜레 2013.06.12 3879
111736 [바낭] 자고 일어났더니 오피스텔, 국정원 얘기로 난리가 났네요 [12] 로이배티 2012.12.12 3879
111735 더럽고 우울한 이야기 [28] 21세기한량 2012.10.11 3879
111734 '아파야 청춘'? X소리 맞는데....왜 [11] soboo 2012.10.04 3879
111733 이 아기는 커서 셜록이 됩니다 [9] 화려한해리포터™ 2013.05.09 3879
111732 소개팅 잡담 [13] 씁쓸익명 2013.07.23 3879
111731 슬램덩크 고양이 풀버전 [7] Johndoe 2012.05.31 3879
111730 여기서 이야기하는 우리 드라마는 무엇일까요 [12] loving_rabbit 2012.05.13 3879
111729 IQ 170에 도전해봅시다. [23] chobo 2011.10.25 3879
111728 주민투표 불판 깝니다 3 [37] jim 2011.08.24 3879
111727 어딘가에서 들은 어느 며느리의 독백. [11] 고인돌 2011.04.20 3879
111726 앨리 맥빌 시즌4를 다시 봤어요. [11] 제주감귤 2011.02.17 3879
111725 어벤저스 최근 인터뷰에서 문제가 된 일들 [11] 모르나가 2015.04.23 3878
111724 리아,손성훈이 오디션 참가자로 나오는군요. [12] 자본주의의돼지 2012.09.29 3878
111723 한국의 참치통조림 (지속가능성) 순위 [14] Ruthy 2012.09.05 3878
111722 어떤 고객이십니까? [24] drlinus 2013.01.10 3878
111721 허위를 유포하고 그걸 쿨한양 받아들이는 세태가 더 지겹습니다. [7] 유디트 2012.06.06 3878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