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기다림

2020.02.13 0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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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새벽,  여자는 잠시 정신이 듭니다. 예전엔 이 시간에 눈을 뜨면 그녀의 가슴이 찌르는 듯 아프기도 했어요. 
어둑한 거실. 베란다 너머를 둘러보면 불켜진 몇 개의 창들과 옅게 퍼지는 가로등 불빛이 보입니다. 암회색 하늘과 구름, 그 아래로 저마다의 침묵을 담고 있는 건물들을 여자는 뚫어져라 바라봐요. 마음이 아프다는 것도 그녀는 모르고 있었죠. 
그가 올 시간입니다. 초조하게 기다리는 것은 아니에요. 그가 새벽마다 자신을 방문하는 게 언제부터였는지 여자는 모릅니다. 아무것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상태인 거죠.

새벽마다 여자는 잠시 정신이 듭니다. 오직 새벽 무렵에만 그녀는 눈을 뜨고 어두운 베란다 창앞에 서서 밖을 바라봐요. 시간은 정확하게 지나가므로, 여자는 곧 가느다란 길을 걸어 아파트 광장으로 들어서는 가냘픈 인영을 보게 됩니다. 그 그림자가 그예요. 여자에게 정신이란 새벽에 눈을 뜨는 일이고, 원근법 속에 펼쳐지는 풍경을 창 너머로 바라보며 그를 기다리는 일입니다.

그것이 새벽이에요. 그가 옵니다. 문고리가 돌아가고 언제나처럼 별 표정이 없는 한 남자가 들어서요. 여자는 낯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를 바라보는 동안 자신에게 들 수도 있는 모든 서름한 감정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단지 여자는 그를 맹목적으로 반기며 웃어요. 그는 가지고 온 나무바구니에서 따뜻한 책과 농도 진한 음반을 꺼내 탁자에 내려놓고 여자를 한 번 힐끔 바라본 뒤 창가로 갑니다.

그가 오기 전까지 여자가 넘겨다 보았던 창가에 그는 등을 보이고 서 있습니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여자는 그가 자신을 볼 수 있다는 듯 웃고 있어요. 그도 그걸 알고 있죠. 매번 그가 창가에서 돌아서면 여자가 웃고 앉아 있었으니까요.
그가 등을 돌리고 있는 동안, 그가 오기 전과는 달리 여자는 그의 얼굴을 초조하게 기다립니다. 잠시 후 그가 자신의 곁으로 다가와 관심을 기울이는 동안에는 다시 마음이 진정되기 때문에 참고 기다릴 수 있어요.
그가 창너머로 풍경을 향해 서 있을 때면, 여자도 다시 한 번 창 밖을 건너다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가 이미 그녀에게 도착해 있는 이상 창밖에 여자의 흥미를 끌 만한 건 없는 것이죠. 여자는 그가 어서 자기 곁으로 다가오기만을 기다려요.

새벽이고 여자는 잠시 정신이 듭니다. 정신이 드는 이유는 그를 느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언젠가 한번 여자가 이 생각을 말했을 때, 그는 아무말도 듣지도 못했다는 듯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어요. 그럴 때면 '그는 듣지 못한 것이다.'고 여자는 생각해버리고 말죠.
여자는 테이블에다 그가 가져온 책을 펼치고 음반을 걸어둡니다. 그의 등을 보고 있으면 무관심한 사물의 세계에 둘러싸이는 듯 서러움과 두려움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여자는 그의 시선을 기다리며 한껏 웃습니다. 한번은 그가 웃고 있는 여자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며 가만히 그녀의 뺨을 만진 적이 있어요. 그래서 여자 뺨의 살이 빠져서 계곡이 생겼다는 걸 남자는 알고 있습니다.

그가 창가에 너무 오래 서 있습니다. 여자의 정신에서 서서히 안개가 걷혀요. 멀리 있을 때보다 가까이 있는 그를 기다리는 게 여자를 지치게 만들죠. 그의 존재를 느끼고 싶어서 여자는 필사적으로 명료해지는 정신에 저항합니다. 깨어나지 않으려고 애쓰다보니 얼굴이 푸들거릴 지경입니다.
새벽이고 잠시 정신이 들어요. 여자는 그의 등을 보며  그가 가져온 음반으로 마른 귀를 적십니다. 비통한 마음에 눈물이 고이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아요. 그에게 무슨 말이든 하고 싶지만 그보다는 점차 밝아지는 정신의 힘이 더 강하죠. 여자는 오랜 시간 곁에서 버텨준 비치목 책상 앞에 쓰러지듯 앉으며 심호흡을 합니다. 

그가 마지막 의식으로 음악을 끄고나서 여자를 한 번 돌아본 뒤 문을 엽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여자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을 감아요. 복도를 걸어 계단을 내려가는 그의 발소리를 그녀는 끝까지 헤아리며 듣습니다. 이미 여자의 눈 앞엔 추상적인 도형들 같은 현실의 영상들이 어른거리기 시작하지만, 귀로는 그가 뚜벅뚜벅 광장을 걸어나가는 소리라도 들으려고 애씁니다.

그가 오는 날이면 여자는 틀림없이 다시 새벽 무렵에 깨어날 거예요. 자신이 아는 것 가운데 새벽이란 단어만이 유일하게 색채가 있다는 듯,  여자는 '새벽'이라고 중얼거리며 눈 앞의 이해할 수 없는 무채색의 도형들에 대항합니다.  그러다가 곧 그녀는 빛이 들기 시작한 정신으로 거대한 하루를 맞이해요. 사라지는 그의 발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기 때문에 결코 멎는 일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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