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극장 나들이했어요. '사랑은 낙엽을 타고'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도 극장에선 처음으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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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 옮기고 나서야 알았어요. 두 사람 사이에 개가 들어가 있네요. ㅎ 실제로 극장 장면에는 없던 걸 저렇게 예쁘게 넣어놓은 것을 보니 감독님이 개를 아주 사랑하시나 봅니다. 감독님 개라고 하더라고요.

영화는 이 감독의 이전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대략 인물들은 예전(80년대?) 스타일인 가운데 언제인지 시간을 특정하기 어렵고 현실의 구차함에도 불구하고 단순함이나 단정함에서 오는 아름다움과 힘이 느껴지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핀란드, 하면 생각나는 것 중에 저 뒤에 있는 순위로 노키아도 있잖아요. 영화 속에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침공을 당한 뉴스가 구식 라디오에서 여러 차례 나와 현재인 척하지만 두 사람은 나중에 보니 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락처를 종이에 적어서 건넵니다.(영화 후반에 주소도 종이로 전달) 종이는 주머니에서 흘러 날아가고 연락을 못하게 되고요. 만난지 얼마 안 되었으나 호감을 가진 두 사람의 마음이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숙성하게 되는데는 이런 종류의 장치가 필요하잖아요. 연락 단절이라는 사건. 그 사이 '시간' 말입니다. 


이 글 제목이 왜 저러냐면 요즘 읽고 있는 한병철의 [시간의 향기]와 영화가 묘하게 연결된 지점이 있다고 생각해서예요. 아직 다 읽지는 못했어요. 영화를 본 후 어째서 연관짓게 되었는지 책의 내용을 조금만 소개하겠습니다. 

과거에는 완결된 '그림'이나 진보를 향한 '선'의 형태였던 시간이 지금은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점'들로 흩어져 있는 형태가 되었다, 연결은 끊어져 있고 점들 사이엔 권태를 불러오는 공허만이 존재한다, 지금의 시간에는 적절한 때라든가 완결이라든가의 성격은 없다고 하고 있어요. 사람들은 이 사건 저 사건, 이 정보 저 정보, 이 이미지 저 이미지 사이를 황급히 이동하며 삶은 어지럽게 날아다니고, 시간은 불시에 나타났다 불시에 사라지므로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도 없고 다만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는 업데이트만이 거듭되고 이전의 것은 덮어쓰기가 되며 잊혀진다는 것이죠. 이분 이야기에 수긍하게 되는 것이 인터넷 뉴스를 보다보면 그런 생각이 참으로 들게 됩니다. 엄청 중요한 사건 같은데 하루이틀이 지나면 또 다른 센세이셔널한 사건이나 발표 같은 것이 등장해서 며칠 안에 이전 것은 잊혀지잖아요. 권력자들이 이용하기도 하고...여튼 세상이 그렇게 굴러가고 있습니다. 그거 어떻게 되었지, 궁금하면 애써 검색해야만 하고 그나마 끈기 있게 다루는 후속 기사도 드물지요.


이 영화에서 시간 특정이 어렵다고 했는데 뉴스에 현재 사건이 나오지만 두 사람의 관계 형성은 매우 아날로그적인, 디지털 이전의 구식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감독은 아마도 인간의 관계에서만은, 서로를 향하는 마음에 필요한 시간의 문턱을 지나야 함을 말하고 있는 거 같습니다. 전화번호를 적은 종이를 잃어버렸으니 구두가 닳도록 찾아다녀야 하겠고요, 술에 맺힌 게 많은 여자와 술꾼인 남자가 만나려면 각자 견디는 시간이자 공감을 형성할 시간이 필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겠습니다. 늘상 폰을 들여다 보며, 사방에 흩어져 순간으로 존재하는 문자, 인스타, 트윗과 숏폼 등의 대체 가능한 시간에 휩쓸려 있다면 이 관계는 가능하지 않았을 겁니다. 

영화에서 두 번 등장하는 다른 사람의 옷을 이어받아 입는 장면도 시간은 연결되어 있음을 떠올리게 했어요. 또한 마지막 장면은 영화 '모던 타임즈'의 시간을 이어받는 것 같은 결말을 보여 줍니다. 하지만 '모던 타임즈'의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만은 아닌 것이 이 영화의 결말엔 인간이(에게) 곁을 내 주는 동물 친구까지 끼워넣어 놨습니다. 


안사의 친구가 안사에게 오늘따라 왜 말이 없냐?라고 하는 순간 웃음이 났습니다. 아마 의도적으로 넣은 대사가 아닐까 짐작했어요. 이 감독님 영화의 인물들은 여전히 정말 말수가 적고요, 전철로 출퇴근 중에도 폰은 어디 있는지 그냥 생각에 잠겨 있습니다.

카우리스마키 감독이 무슨 새로운 시도를 한 것도 아니고 이야기도 소박한데 이 영화를 다들 좋아하는 것을 보면 이런 영화, 이런 이야기를 그리워한 모양이라고 생각했어요. 

이 영화 보시고 시나몬롤과 차 한 잔 하십시오.ㅎㅎ


참, 한병철 저자의 지금 읽는 책은 앞 부분에 조금 헤맸는데 점점 빠져드네요. 이번 책까지 한 권만 더 읽으려고 했는데 아마 또 만날 거 같습니다. 책이 얇은데도 금방 읽게 되진 않아요. 좀 감탄하고 있습니다. 어찌 이런 생각들을 한단말인가, 생각 전문가들인 철학자들은 대단하구나. 단순히 문과이과로 나눌 수는 없지만, 과학자만 대단하다고 하는 시대에 새로이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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