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저리> 명절이면 우리집에 와서 묵고가던 형 생각난다.  별명이 八大山人이었던 형.
머저리누나> 갑자기 왜?
머저리> 올 때마다  내 방에서 잤잖아.
머저리> 한번은 잠자리에서 보들레르의 시 <파리의 우울>을 암송해주는 거야. 불어가 그렇게 예쁜 언어인지 첨 알았어.
머저리누나> 언어감각이 뛰어난 편이었지. 

머저리> 웬지 그 형을 볼 때면 자부심이라는 단어가 자동으로 떠올랐어.  평범한 사람들을 한 수 아래로 내려다보는 듯한 자부심말야.
머저리> 한번은 그런 속내를 비쳤더니 "내가 남보다 한시간 일찍 가는 시계이긴 하지" 라며 씩 웃더라. 그 표정이 생각나네.
머저리누나> 세상의 유동하는 흐름을 남보다 먼저 파악하는 편이긴 했지.
머저리누나> 근데 남들을 한 수 아래로 보진 않았어. 오히려 두려운 존재들이라고 생각했지.

머저리> 그 형이 내게 연필화도 가르쳐줬잖아. 사물 보는 법을 배우는덴 최고라며.
머저리누나> 그랬구나...
머저리> 누난 날카로운 사람이고 난 둥근 사람이라는 평도 했지.
머저리누나> (피식) 술대작에서 내게 졌기 땜에 꽁해서 한 험담이었을 것임.

머저리> 사물을 명명하는 법도 가르쳐줬는데.
머저리누나> 음?
머저리> 무서운 단어에는 색을 입혀 표현해 보랬어. 녹색 여우, 노랑귀신.... 이렇게.
머저리> 선승의 안광처럼 날카롭던 그 눈길이 가끔 생각날 때가 있어.
머저리누나> .......
머저리> 그곳에서도 세차게 생각을 뒤채며 엄청난 생동감과 박력을 뿜고 있겠지?
머저리누나> ........ 

* 십 여년 전, 그가 갑자기 세상을 버리고 떠났던 날. 
비보를 접하던 순간에도, 병원 빈소에서 영정사진 앞에 섰을 때도, 그의 몸을 태우는 화장터 불길을 보면서도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이 오열하는 옆자리에 서서 아, 내가 왜 이러지? 왜 이렇게 눈물이 안 나지? 의아해서 마음이 점점 무덤덤해졌던 기억만 있어요.
그의 부모님이 제주도에서 감귤농사를 지으시는데, 올 설에도 어김없이 한 상자 보내주셨습니다.
나이 드는 현상인지 빈 위장이 꼬르륵 소리를 내서 몇 알 씻어 먹다가, 괜히 울컥해서 어제 오후 막내랑 뒹굴거리며 나눴던 대화를 적어봐요.

49젯날,  잠이 오지 않아 잡은 책에서 이런 글을 읽었더랬습니다.
" 미국의 어느 약국에서 팔고 있다는 목각의 작은새, 그 날개 아래 장식 나무판자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다.
 <나는 새. 나는 뒤로 날아가요. 왠지 어디로 갈까 앞으로 가기보다 어디에 있었는지 알고 싶으니까요.> 
죽음은 사람이 그저 뒤로 나는 것이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34315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53590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64018
111473 코로나19의 주말 [1] 어제부터익명 2020.02.24 656
111472 1917 질문 있습니다 (스포 포함) [3] 飛頂上 2020.02.24 387
111471 코로나 19와 눈먼 자들의 도시 [5] 어디로갈까 2020.02.24 919
111470 요즘 읽고 있는 책 [3] 크림카라멜 2020.02.24 524
111469 일상 2. [10] 잔인한오후 2020.02.24 597
111468 SNS를 하다보면 [10] 갓파쿠 2020.02.24 597
111467 안철수 : 이해찬, 황교안 공개토론하자 [21] 가라 2020.02.23 731
111466 [코로나19] 에 정치 묻히면 다 망합니다 [21] ssoboo 2020.02.23 1578
111465 행사들도 줄줄이 취소 연기 [2] 갓파쿠 2020.02.23 645
111464 닮은 꼴 영화 <아름다운 비행>, <아름다운 여행> [4] 부기우기 2020.02.23 859
111463 안철수의 거짓말 또는 건망증 [18] 좋은사람 2020.02.23 1128
111462 1917 좋내요(스포일러) [2] 메피스토 2020.02.23 521
111461 지금 시드니 공항인데 [8] ssoboo 2020.02.23 1524
111460 코로나 바이러스의 변이 [7] 어제부터익명 2020.02.23 1197
111459 오스카 여러가지 (상 카테고리, 탈 local, 인종차별에 예민해진 미국인, 엘렌 드제너러스 논란 등) [11] tomof 2020.02.22 1096
111458 1917 잡담 [1] mindystclaire 2020.02.22 549
111457 씨름의 희열 마지막회 생방 시작합니다. (9:15~) [31] 가라 2020.02.22 504
111456 역시 건강이 최고인 듯 합니다 예정수 2020.02.22 500
111455 식약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차단 마스크 'KF94·99' 사용해야" [36] underground 2020.02.22 2293
111454 1.tv국민일보 안철수 인터뷰 2.알란 릭맨 [2] 키드 2020.02.22 579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