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4.

2020.03.07 09:40

잔인한오후 조회 수:680

특정한 제목으로 꾸준한 글을 쓸 때, 이게 과연 그 제목에 걸맞는 내용인가? 하고 목전에서 후퇴합니다. 왜 그렇게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독서_


코로나 시대의 독서, 어울리는 한 쌍인 듯 하지만 사실 이 기간에 책을 더 안 읽습니다. 의외로 책 읽기에는 누군가와 떠들 수 있을꺼라는 동기가 필요하더군요. 2주에 한 번 모였던 독서모임이 4회차 취소되고, 근근히 지정된 책을 읽고 참석하는 모임도 구성 여부가 불투명해졌으니, 함께 읽고 누구와 말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아직까지 독서 모임에서 감염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질 않는걸 보면 다들 저와 같은 고통을 나누고 있다고 봐야겠죠? (성경을 읽고 나누는 모임을 독서 모임에서 제명한다면 말입니다만.)


불현듯 빗 소리를 듣고 싶다는 생각을 한 후, 얼마 간의 시행착오를 거쳐 작은 블루투스 스피커를 통해 방 안을 소리로 채워냈습니다. 유투브에 있는 10시간 내지 8시간 짜리 빗 소리들은 안 좋은 음향기기를 거쳐오는 동안 다른 소리처럼 들리더군요. 무언가를 기름에 튀기는 소리, 머그에 물을 부어 컵 벽에 부딪히는 소리,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수도꼭지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 같은 걸로요. 그래도 듣다 보면 마음은 고요하게 정말 '방 안에 비가 오는' 것처럼 받아들입니다. 책이 읽히기도 하구요. (사실 꿋꿋하게 유투브 플레티넘을 신청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계속 틀어놓으려면 휴대폰을 손 대면 안 됩니다. 그게 더 효과가 있는지도?)


옛날 이야기에서 방 안을 빛으로 가득 채웠다고 하는데, 참 시각적 장면이긴 한데, 다듬이를 사서 두드리는게 더 충실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소리를 틀어놓고 있다보면, 두 가지 마술적인 상황을 만나는데, 하나가 빗 소리의 음량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겁니다. 소리 뽑기도 아니고 비가 내리는 소리를 조절한다니, 하고 이상한 기분을 느낍니다. 다른 하나는 이런 소리에도 과부화 되서 꺼버린 직후 방 안을 가득 채우는 공백이 빠르게 다가올 때죠.


요즘은 책을 되는대로 아무 곳에서부터나 읽어 나가는데, [전쟁과 인간]의 경우, 중국의 감옥에 갖힌 일본 병사가 이제나 저제나 어떻게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고민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사람은 글쓰기를 거치며 자신도 모르게 체화하는데, 어떤 이를 다르게 만들고 싶다면 어딘가에 가둬놓고 글의 내용과 상관 없는 피드백을 꾸준히 해주면 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다만 책의 내용은 그 변화시키기를 실패한 내용이었지만.) 이 저자는 처음에 [상실된 비애]라는 책을 인용합니다. '과거의 부인은 그 사회에 상흔을 남긴다.' 제목과 인용구가 꼬리를 물고 다음 생각으로 이어가게 하였습니다.


한국은 감정과잉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감정을 존중하지 않는다고요. 어쩌면 감정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에 감정 과잉 표현의 사회처럼 보이는지도 모릅니다. (귀가 잘 안 들리는 사람과는 갈 수록 더 큰 목소리로 대화하게 되듯.)


누가 뭐라하든 저에게는 정말 크게 두려웠던 두 가지 국면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박근혜가 우는 것을 보고 '즙짜기'라고 사람들이 칭하는 걸 봤을 때였고, 다른 하나는 통곡하고 있는 사람들을 '웃음 참기 대회'라고 밈으로 만드는 자들을 봤을 때였습니다. 과거에도 특별하게 다르긴 했겠냐마는, 타자의 감정 표현에 대해 보편적 해석을 파괴하는 행위들은 결국 전반적인 감정 표현에 대한 재해석을 끌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인으로서, 사람의 쓸모를 학업의 결과로 자주 평가하고 그 요체는 이성이라는 사고가 횡행함을 느낍니다. 당연하게도 반대 급부로 감정은 천하거나 생각이 짧은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어떤 이들이 감정의 원인을 통해 결과를 도출할 때 비웃거나 멍청한 것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잦습니다. 그러나 저는 윗저자의 말을 더 믿습니다. '자신의 감정이든 타인의 감정이든 감정을 알아듣는 것보다는, 사물의 성취나 귀결을 아는 것이 더 우선적이라고 생각해버리는 것은 왜일까. 우리의 삶을 충실하게 하는 것은 지식이나 의지보다는 감정의 흐름에 있는데도 말이다.' 또한 꼭 격양하는 것만이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논리적이고 세심하며 깊은 것이 감정이기도 합니다. 이런 부분들을 어떻게 조롱하지 않고 나눌 수 있는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앙상블_


지인과 대화하면서 지금까지 의문이었던 '왜 나는 마블 영화들을 좋아하는가'에 대한 답을 얻었습니다.


다양한 성격의 사람들이 서로 대면하면서 생겨나는 행동과 반응을 매우 흥미로워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일종의 n차 방정식 풀기에 가까운데, 알다시피 n의 크기가 커질수록 문제 풀이는 어려워집니다. (a^n이라던가 삼체라던가까지 갈 필요도 없겠지요.) 작가는 막다른 골목에 쫒겨들어 자신의 역량을 어떻게든 보여야 합니다. 아마도 어벤져스에서 뉴욕의 습격 장면보다, 핼리 캐리어의 콩가루 장면을 더 좋아하는 이유도 그런 것이겠지요.


[결혼 이야기]도 굉장히 좋았고, 보지도 않았는데 [12인의 성난 사람들]이 기대가 됩니다. 그런 면에서는 [액스맨: 아포칼립스]조차 나쁘지 않았고 [액스맨: 다크 피닉스]가 최악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것을 제작자 입장에서 생각하게 됩니다. 다양한 능력자들이 맞부딛히는 장면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라는 문제 같은 거 말이죠. 나쁜 답은 페어를 묶어서 나머지 사람들은 없는 것처럼 싸우는 겁니다. 하지만 더 나쁜 답이라면 왜인지 줄 서서 차례차례 능력 시연을 하는 거겠죠. 글을 써 볼수록, 등장 인물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해결이 아니라, 제작자가 처한 상황에 대한 문제 해결력을 보는 관점이네요. (좋은 답은 각자가 섞여서 생각지도 못했지만 납득이 가는 교차 행동을 하는 겁니다.)


아마 이런 관점은 곽재식님의 어떤 글을 통해 확실해졌던듯 합니다. 아마 이런 글이었습니다. 'ㅇㅇ에서 주인공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갈등에 직면합니다. 조력자는 다들 사라져 심리적으로도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고, 실제로도 절벽의 끝으로 밀려나고 있는 중이지요. 제작자는 이 문제를 탁월하게 해결합니다.'


밤의 도서관_


반납해야 할 책들이 있어 애인과 함께 자정이 되가는 시간에 도서관에 갔습니다. 유리 문에 붙은 휴관 알림을 보는데, 개관 날짜가 덧붙여져 있더군요. 책을 반납함에 넣고 공원을 걸었습니다. (보통 구시가지의 신도서관들은 지을 곳을 헤매다 결국 공원 부지의 한 켠에 짓는 경우가 많더군요.)


선선한 공기와 가로등 불빛 아래 우리 이외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운동 기구와 놀이 구조물들은 조용히 서 있고, 나무들 한 켠에는 '코로나 바이러스 - 모이는 곳은 피하세요' 요지의 현수막이 걸려 있었습니다. 정돈되어 철봉에 걸어진 훌라우프 여러 개와 정자에 덧붙인 와상 두 개는 이 곳이 사람들에게 애용되고 있다는 인상을 줬습니다. 아마 평소였다면 분명히 이 시간에도 인적이 있었을 거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바퀴를 돌고, 반 바퀴를 채 못 돌아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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