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nolta1

 

 

 1. 샤를빌의 뫼즈 강변입니다. 부드러운 실비가 내렸고, 빗줄기 사이로 유희하듯 햇살이 파고 들던 날이었어요. 삶의 누추함이 신비로 여겨지는 경이로운 한순간을 그곳에서 경험했습니다. 

남자들은 의지도 집념도 회한도 없어보였어요. 그들이 서서 바라본 게 희망과 절망 중 어느 것이었는지 저는 모르지만, 되돌릴 수 없는 세상을 그들과 함께 떠내려가고 있다는 감각을 또렷하게 느끼며 이상하게 저는 행복했습니다. 
잘 찍은 사진은 결코 아니지만, 흘러가는 느낌 하나를 민감하게 잡아두었다는 것에 의의를 두며 올려봅니다. 

여기까지 쓰고 나서 엔터 키를 누르는 순간, 민감하다가 강하다로 타이핑되어 있는 걸 발견했어요. 이상하죠. 머리는 민감하다는 단어를 명령했는데, 손은 그걸 강하다로 바꾸어서 타이핑해 놓았어요.
민감하다라고 하면 그들과 제가 교감하는 사이인 것 같은데, 강하다로 저절로 타이핑된 걸 보니 그들은 그저 '먼 그대'였던 모양입니다. 

위의 문장들을 다시 읽어봅니다.  '흘러가는 느낌 하나를 민감하게 잘 잡아두었다는데 의의를 둔다.'는 문장을, '흘러가는 사랑 하나를 더듬어 본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싶다.'로 읽습니다. 그렇게 속절없이 흘러가버릴 사랑 하나를 담고 있는 사진 한 장. 당연히 방점은 '흘러간'이 아니라 '담고 있다'에 찍힙니다. 

침투할 수 없이 매끄럽고 단단한 느낌의 기표인 사진 한 장에, 저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사랑을 가만히 건드려 봅니다. 흘러간 것들은 다 고마워요. 흘러갔기 때문이 아니라 한때 있어주었으므로.
빛을 보면 알겠지만 많이 흐린 날이었어요.  이 사진을 보며 누군가 혹시 침착함을 느끼신다면, 그건 제 마음의 카메라가 흐린 날을 기록할 줄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음?)

2. 흘러간 것과 사라진 것, 흘러가 사라졌는데도 마음 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것을 구분해 내는 사람들이 있죠.  (저는 그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에요.) 그들은 구분할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해 말하기까지 합니다.
기억하든 잊어버리든, 그들의 마음 창고에는 섬광 같았던 순간들이 가득하고, 창고 속에 갇힌 그것들은 혼자서 은밀하게 술처럼 익어가요. 그리고 어느 날, 시간 속에서 발효된 그것들은 창고의 문과 벽을 뚫고 스스로 걸어나온다. 때로는 악몽으로 때로는 행복으로.

파우스트의 마지막 장면에서 괴테는 이렇게 말했죠.  “순간 지나쳐 사라진 것들은 비유에 불과하여.... Alles Vergaengliche ist nur ein Gleichnis."
이 구절은 인생을 다 산 사람의 입에서만 나올 수 있는 말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순간 지나쳐 사라진 것들은 비유에 불과하여...” 는 읽을 때마다 무엇에 대한 비유일까?를 생각하게 만들어요. 
그러다 보면, 모든 것을 그 '하나'에 집약시킬 수 있는 '순간'을 떠올려보게 됩니다. 사라져 버린 것들이 모두 다 의미를 지니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대순간'이니까요.
우리에게는 사라져버리는 모든 것을 기억할 의무가 없습니다. 의무는 '대순간'의 몫이죠.

3. 사라져버리는 찰나의 것을 포착하려는 자세에 대한 저의 이미지는 이런 것입니다. 한 대의 마차가 어스름 평원을 지나가요. 어둠은 서서히 그러나 끈덕지게 진군해오고, 마차는 밀려오는 어둠보다 조금이라도 앞서기 위해 제 속력를 다하죠. 
하지만 마차보다 어둠의 속도가 더 빠르고 단호합니다. 결국 마차는 어둠에 묻혀버려요. 

사진이든 글이든, 기록해내려는 의지는 저 이미지가 보여주는 한계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눈앞에 펼쳐지는 것들 중에서 제가 보는 것은 한부부분이고 그 부분 중의 일부만을 저는 기록해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라져 버리는 것과 사라져 버리게 하는 무엇에 대해 반사적으로 저는 저항할 뿐이죠. 저는 하나의 카메라입니다. 특별히 흐린 날에 민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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