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에, 종일 꼼질꼼질 집안일을 끝내고 시크릿가든을 기다리며 쉬고 있는데 문자소리가 울립니다.

작은이모가 '화요일 시간 되니, 저녁 먹자.' 라고 짤막한 문자를 보내셨습니다. 문득 달력을 보니 아, 1월 4일.

믿을 수 없게도 까맣게 잊었던거예요 하나뿐인 딸내미가. 오늘은 그녀의 2주기, 믿을 수 없게도 순식간에 2년이 지나 있었어요.

 

2년 전 오늘 이전에는 딱히 교류도 없고 마냥 어색하기만 하던 그녀의 언니 둘과 말끔한 백화점 식당에 앉아 온모밀을 먹었습니다.

작년 이날에는 추도예배라는 걸 했는데, 이모 둘이 독실한 교인이셔서 제사 따위 안 지내시지 말입니다. 뭐 저도 제사를 지내고 싶은

건 아니지만 교회 문턱 한 번 밟지 않았던 그녀에게 기도에 찬송은, 좀 아니지 싶어서 그냥 밥 한끼 같이 먹고 마는 올해의 결정이 참

괜찮다고 생각했지요. 

전 온모밀 절반을 남겼는데, 숙연한 분위기에 목이 멨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고 다섯 시쯤 회사 동료들과 함께 먹은 순대떡볶이튀김때문에

뱃속이 더부룩해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근황을 이야기하는 평범한 식사자리를 끝내고 카페에서 차를 마셨는데, 이야기를 나누며 새삼 느껴지는 것이

앞에 앉은 두 사람이 그녀와 참 많이 닮았다는 거였습니다. 같은 트라우마에서 기인한, 기저에 늪처럼 가라앉아 있는 어떤 우울.

자신을 후벼파고 끊임없이 갉아먹는, 모른 체는 해도 영원히 따돌릴 수 없는, 그런 걸 자매들 모두 갖고 있더군요.

그녀는 두 언니를 평생 짝사랑했을 뿐 늘 따돌림당해 왔기 때문에, 전 그들이 그녀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는데 말이죠.

뭐 저도 그녀의 뱃속에서 나와 그녀의 베프이자 천적으로 23년을 살았으니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물려받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남은 자들이 으레 하는 의식을 우리도 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더라도 하고 있는 이야기는 세 가지가

모두 다른 거였어요. 각자가 가지고 있는 회한을 그저 대화의 형식을 빌어서 실을 자아내듯 뽑아내고, 뽑아내고, 뽑아내고, 하는 식.

모두는 조금씩 울었는데, 그것도 공감의 눈물은 아니었고, 각자가 각자의 회한에 취해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하는 그런 눈물이었죠.

나쁘지 않았어요, 타인과 대화를 나누면서 가장 실제에 가깝게 그녀에 대한 제 감정을 털어놓을 수 있는 자리였으니까요.

 

벌써 2년이 지났다니 믿기지 않는다, 고 했는데 이젠 저한테 엄마가 있었던 시절이 있었나, 꼭 전생 정도 되는 일 같아요.

워낙 건조한데다 홀로 온전하다고 믿는 타입이라 '엄마'의 결핍 때문에 힘든 일은 거의 없지만, 기실 그녀는 제게 '엄마'는 아니니까요.

등에 새긴 엄청 큰 천수관음 문신같기도 하고, 나는 모르지만 늘 어깨에 매달려있는 피로군같기도 하고. 그러니 지금 그녀가 제 옆에

있더라도 역시 그리 좋은 관계는 아닐 것 같아요. 부모자식간 상성이 안 맞는 경우가 그리 희귀한 것도 아니니 이제 와서 그에 대해

아쉬워할 이유는 없지요. 다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서 모든 경우의 수를 떠올려봐도 그녀가 생전에 자기 자신의 상처를 치유받을

기회가 있었을거란 생각이 들지 않는 게 가장 서글퍼요. 자기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힘이 없는 종류의 사람은 그걸 보듬어줄 타인을 만나야

하는데 그녀는 어쩌면 그리도 지지리 복이 없었는지 엄마 아부지 언니들 남동생 남편에 자식까지 최악의 조합으로만 골라 가졌었으니까요.

시간이 지금보다 조금 더 지나면 내가 그런 존재가 돼줄 수도 있었겠지만 풍수지탄이 늘 그렇듯 부질없고.

 

생각이 이것저것 많아서 일기장에 뭘 좀 쓸까 듀게에 쓸까 고민하다가 일기장에 쓰면 미친듯이 길고 감성돋고 파토스돋는 글 쓰면서 혼자 거기

취해서 줄줄 울고 자겠지, 아 그건 정말 싫다. 그래서 여기에 썼어요. 일기 쓰고 바이트 낭비하고 거기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주제로 글 써서

읽은 분들께 미안해지네요. 모두 군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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