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9.09 01:41
[아가씨]는 유일하게 제가 본 박찬욱 영화중에서 찜찜함이 남는 영화였어요.
박찬욱이 다른 영화들에서 옳건 그르건 상관 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왔던 것에 비해,
여기서는 '정치적으로 올바른'이라는 정해진 답안을 알리바이로 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진짜 하고싶었던 것은 물론 사도마조히즘적인 분위기가 지배하는 저택의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었을 터이고요.
영화 어딜봐도 박찬욱 특유의 미쟝센에 대한 집착과 노력이 팍팍 들어간 곳은 저택이니까요.
물론, 한 때 진보정당을 공개지지하기도 한 나름 리버럴한 지식인인 박찬욱이
나는 여성에 대한 혐오와 가학으로 가득찬 장면을 연출하고 싶다! 라고 할 순 없으니,
핑계로 하하하, 여혐영화인줄 아셨죠? 여러분 사실 이건 매우 정치적으로 올바른 여성주의적 영화입니다.
마초남성들의 세계를 뚫고 나가는 여성들의 연대에 대한 이야기라고요 하하하.
이런게 아닐까 싶어요.
제가 그 생각이 들었던 건, 박찬욱이 백작을 다루는 방식 때문이었어요.
영화 초반까지만해도 백작은 단순한 사람이죠.
그런데 영화 중반부터 이야기가 복잡해지면서 아가씨, 하녀와 함께 백작도 복잡해지기 시작해요.
서로 속고 속인다는 점에서, 적어도 윤리적 층위에서는 중심 세 인물이 동등해져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고 복잡하죠.
반면에 숙부인 코우즈키는 내내 나쁜놈이라는 점에서 저 세 인물과 대비되요.
그리고 그런 코우즈키랑 대비되면서 무당과 노비사이에서 태어난 백작을 움직이는 동력이
성이 아니라 돈과 성공임도 드러나고요.
마지막 고문장면에서 드러나듯이 심지어 백작은 아가씨랑 첫날밤을 치르지도 않아요!
그런데 갑자기, 영화 후반부에 가면서 복잡한 인물들을 복잡한 관계가 선악의 이분법으로 나누어져요.
이 과정에서 거래라는 방식이긴 하지만, 탈출을 돕기도 했던 백작이 갑자기 나쁜 놈,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놈으로 한순간에 전락해요.
물론, 이 영화에서 나쁜놈의 자리는 마초의 자리고요.
이걸 보여주는게 후반부의 아가씨와 백작 간의 호텔에서의 베드신이에요.
백작과 아가씨의 성행위 장면은 합의된 것(정확히는 아가씨가 의도한 것)이에요.
그런데 박찬욱은 갑자기 백작에게 "여자들은 사실 억지로하는 관계에서 극상의 쾌락을 느끼죠."
라는 뜬금포 대사를 치게 만들면서 마치 백작이 아가씨를 강간하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해요.
분명히 그 직전까지 둘 간에 유혹의 게임이 오갔는데도 불구하고요.
덕분에 갑자기 백작이란 캐릭터가 가진 복잡성이 사라지고,
백작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아가씨-하녀의 반대편에 위치한 나쁜 마초가 되어버려요.
그리고 이런 느낌에 쐐기를 박는 대사가, 백작의 유언인 “그래도 자지는 지키고 죽을 수 있어 다행이다”고요.
이걸 보면서, 박찬욱이 정치적으로 올바름을 내세우기 위한 알리바이를 성급하게 만들어내기 위해,
백작이라는 캐릭터를 얄팍하게 만들어 소비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좀 비겁하죠.
덕분에 아가씨와 하녀의 이야기도 마지막에 좀 얄팍해지고요. 변장해서 배타고 가는걸로 끝내다니...
특히 하녀가 탈출하는 장면은 예전의 진중권이라면 데우스 엑스 마키나!!! 이랬을 거에요.
이런 식으로 하고싶은게 아니라 해야될 해야했다면,
차라리, 아가씨와 하녀가 각성해서 저택으로 돌아가 일본도로 코우즈키를 비롯한 남자들을 다 쳐 죽이는 식이었으면
더 유쾌했을 거에요. 뭐, 그러면 이미 박찬욱이 아니라 타란티노겠지만요.
2016.09.09 02:08
2016.09.09 07:23
백작 캐릭터에 대해서라면 전 좀 다르게 느꼈어요.
사실 저기서 백작은 저렇게 긴 러닝타임을 차지하고 있을 인물이 아닌데,
감독이 어쩔 수 없는 남자라서(??) 남자란 캐릭터를 대충 소모하질 못하고
어떻게든 정체성(아가씨를 그래도 진짜 좋아했어! 자지는 지키고 죽을 수 있어 다행이다! 등등)을
변명하듯 구겨넣은 느낌이었거든요.
2016.09.09 08:32
2016.09.09 11:04
저도 박찬욱의 성적 판타지 그 이상은 못 느꼈네요. 자기 성적판타지를 때는 이때구나하며 실컷 묘사한 기분이었습니다.
2016.09.09 11:20
2016.09.09 12:52
자기가 하고 싶었던 것, 정치적 올바름 모두 어중간했다고 느껴요.
라스폰트리에의 몇몇 영화는 여성에 대한 가학으로 화면이 가득차도 정치적 올바름을 져버린다기보다 오히려 새로운 견해를 더하는 느낌인데
그에 비해 아가씨라는 영화를 통해 박찬욱같은 감독은 사실 (여성주의같은 것을 다루기에는)그런 주제에 대해 정녕 치열한 고민을 가지고 있지 못한것 같다는 인상만 받았어요.
박찬욱은 주제를 다루는 감독이 애초에 아닌것 같아요. 무엇을 이야기하느냐보다 어떻게 이야기하느냐가 항상 중요한 감독인것 같고
그래서 대단한 주제없이 자극적이지만 잘짜여진 내러티브를 가진 '올드보이'같은 영화가 그의 최선이라고 보는데
거장의 영화에는 깊이도 필요하고 정치적 올바름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분투중인건지.. 너무 박한 말이긴하지만 제 솔직한 감상이네요.
2016.09.09 12:56
숙부를 별거 없는 평범한 악인으로 표현한게 전 좀 별로 였네요 마지막 부분에 백작한테 아가씨랑의 있었던 첫날밤 이야기 해보라고
채근하는 부분은 진짜....-.- 책을 읽으면서 제가 느꼈던 숙부는 정말 대단한 책덕후였는데 말이죠. 단지 장르가 좀 야설 쪽이였을뿐...
그리고 "차라리, 아가씨와 하녀가 각성해서 저택으로 돌아가 일본도로 코우즈키를 비롯한 남자들을 다 쳐 죽이는 식이었으면
더 유쾌했을 거에요"2
하다못해 둘이서 서재 들어가서 책들 없애는 장면도 차라리 아가씨가 나서서 했으면 더좋았을테데...
그 놈의 책들 낭독하느라 고생했던거 생각하면 말이죠
2016.09.09 13:05
2016.09.09 13:56
정치 공정 이런 거 별로 생각 안 하고 그냥 자기가 보고싶은 거 만든 영화 같은데요.
대부분의 예술이 원래 그렇지 않나요? 히치콕이나 큐브릭이 정치적 올바름을 지양했나요? 항상 과잉 의미부여하고 혼자 배반당하는 건 관객이죠.
2016.09.09 14:23
원래 예술이 그렇고 히치콕이나 큐브릭이 그랬던 것처럼 박찬욱도 예전엔 그랬는데, 이번은 아닌거 같다는게 논의의 포인트 중 하나였어요.
잘 전달되지 못했나보네요. 자기가 보고싶은 것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고, 정치적 올바름에 묶여 있다는 인상이 컸어요.
2016.09.09 14:33
에이..자기 하고싶은대로. 자기가 보고 싶은것만 믿고 앞으로 나아가진 않죠.너무나 하고 싶어서 모든 비판을 무릅쓰고 관철하는건 있어도..
네러티브가 주가되는 대중예술세계에서 순수예술마냥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마구 돌진하는경우가 있을지..
히치콕도 자기에 대한 세간의 비판들 엄청 의식했던 감독이었죠.스튜디오 간섭도 꽤 심했고..그걸 극복하고자 다양한 꼼수를 부렸어야 할만큼.
박찬욱 영화에는 언제나 정서경작가가 버티고 있는데, 둘이서 한국사회에서 예민할 수 있는 소재들에 대해 여러 궁리가 있긴 했겠죠. 어느정도 합의점을 찾은 현재의 결과가 만족스러운지는 모르겠지만.
2016.09.09 16:06
2016.09.09 16:36
대중을 상대하는 창작품에서 정치적 공정성이나 정의구현등 사회적 시선들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기 보다 과정에서 당연히 거치는 자기 검열, 시스템검열의 일부라..
2016.09.09 16:49
당연하지는 않아요. 영화중에는 그다지 도덕적이거나 정치적 공정성과 거리가 먼 작품들 투성이이고. 영화가 사회적 메세지를 전하느냐 마느냐는 필수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이지요. 인터넷에서는 타란티노 영화에서까지 도덕론 펼치는 유학자 투성이지만
2016.09.09 17:02
우리가 볼때 도덕적이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공정하지 못하다고 보이는 작품들도 다 그런 기본적인 과정은 거치고 나온 것들이죠. 그게 사회 시스템안에서 상업적으로 팔리는 작품이라면요. 그 질과 정도의 문제는 있어도.
상업활동을 할만한 창작가로써,특히 대중산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써 어떤 작품을 만드는데 있어서 다양한 기준점과 다양한 쟁점과의 사회적 합의들은 창작을 하는데 아주 기본적인 과정들일뿐인걸요. 나아가 그게 개인이 만들고 올리면 땡인 소규모 작업이 아니라, 수많은 눈을 거치는 영화같은 작업들은 더더욱 그렇죠.검수하는 단계가 몇개인데요.다만 그건 최소한의 기준이라는데서 만족을 할 수 있느냐가 차이 나는거고.
나아가 박찬욱의 영화가 그런것들을 다 내팽겨치고 만드는 형태로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감독이란 입장이 그럴수 있는 위치도 아니구요.
2016.09.09 17:08
기본 심의와 사회 정서에 어긋나지 않는 것과 정치적으로 공정한 메세지를 전달하는 건 아예 다른 문제예요. 글쓰신 분은 지금 아가씨가 페미니즘 메세지를 전달하려는 게 미적지근 하게 끝났다는 말씀이고 바스터블님은 영화의 필수적 도덕성을 계속 말씀하시는데 그건 아가씨가 심의를 통과했느냐 말았느냐의 문제아지요.
그리고 저는 요즘 아가씨를 계속 페미니즘 영화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보이지만 그다지 동의하지 않고 그냥 박찬욱 감독이 자기가 찍고싶은 레즈비언 영화라는 생각이고요.
2016.09.09 17:29
애초 <정치적으로 공정한 메세지, pc함>이라는건 그 명확한 기준이란 없는 일이에요. 사회정서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질과 정도의 차이에서 갈라질 문제죠.
쥬디님은 이 영화가 아예 그런걸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거고, 기타 명감독들도 그냥 자기가 찍고싶은거 찍는거지 그런걸 염두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시지만 그건 상업작품들의 특성상 그럴수 없다
라는 얘기죠. 그 고민의 정도가 우리의 성에 차지 않거나, 시대에 뒤떨어졌거나 더 얄팍할수는 있어도요.
나아가 이 영화에서 누군가가 페미니즘적 흔적을 느껴진다는건, 박찬욱이 레즈비언 영화 만든것을 오독했다고 여기기보다 애초 여성적 시선이 읽히는 영화를 의도했다고 보는게 더 정확할것 같고요. 그 의미가 분명한 원작을 선택한 이유에서부터 그건 명백해요.뭐 그냥 여성 섹스신 넣으려고 원작 선택한거라 느끼실수도 있지만, 한 영화를 기획하고 제작하는데, 박찬욱 정도의 입지에서 그런 단순한 취사선택으로 제작되었을리는 없을것 같구요.
다만 그렇게 풀어낸 그 정도가 누군가에겐 만족스러울수 있겠고 또 전혀 엉뚱하게 보일수도 있겠지요.
2016.09.09 17:51
명감독들이 항상 그렇게 대단한 포부를 안고 영화를 제작할까요? 글쎄요. 전 그냥 박찬욱 감독이 예쁜 배우들 데리고 본인 취향의 ㅅㅅ씬 찍고 싶었고 핑거스미스 원작의 묘사가 적었던 낭독회를 본인식대로 변태적으로 제대로 보여주고 싶어서 이 영화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그 목적에 딱 부합하는 영화가 나왔구요. 페미니즘이 목적이라고 생각한 관객들 눈에는 그게 성이 차지 않으니 부족하다고 느끼는 거겠지만 애초부터 이 영화에 요구할 부분이 아니었구요.
하지만 이영화는 처음부터 페미니즘 으샤으샤 사회적 메세지 으샤으샤한 서프러제트나 고스트 버스터즈보다 훨씬 재미있고 세련되었지요. 영화라는 매체의 목적은 처음부터 사회적 메세지 전달이 아니니까요.
2016.09.09 23:46
저 대화 나누시는 주제와 큰 상관없지만서도. 제 눈에는 고스트 버스터즈가 아가씨 보다 훨 세련되고 재미있었어요. 아가씨는 후반부가 너무 촌스러움.
2016.09.09 20:11
제 글이 박찬욱이 페미니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게 미적지근하게 끝났다는 걸로 들렸으면 좀 심각한 오해에요.
박찬욱이 하고 싶었던 것은 1) 여성에 대한 가학적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는 저택을 연출하는 것이지만,
2) 박찬욱이 가진 남성 진보적 지식인으로서의 포지션(누군가는 그걸 박찬욱의 모범생 컴플랙스라고도 했죠)이 그걸 있는 그대로 연출하는데 발목을 잡았고,
3) '정치적으로 올바른' 페미니즘 코드를 집어 넣어서 영화를 마무리 함으로써, 1)에 대한 알리바이를 만들었지만,
4) 하지만 그 과정이 전혀 유기적으로 붙어있지 못하기에, 3)이 오히려 영화를 평면화 시킴으로써 조야하게 만들었다는 거에요.
2016.09.09 15:39
최근 대부분의 예술들은 오히려 정치 공정 더욱 신경쓰는 편인것 같은데요. 특히 대중예술은 점점 그 방향에 민감해지는 추세인듯하고.. 차라리 박찬욱은 정치 공정 이런거 생각 안하고 작업하는게 나은것 같은데 그도 (어설피) 유행타는건가 싶기도 하네요.
2016.09.09 17:44
복수는 나의 힘이던가요? 이미 그 때부터 본문에서 지적한 (뭔가 있는척) 비겁함 혹은 비열함 혹은 역사에 대한 무례함이 역겨워 비판을 해왔던 사람으로서 참 감개가 무량하군요;
2016.09.09 23:14
2016.09.10 00:13
제가 얼빠 예쁨빠여서 그런지, 영화가 예뻐서인지, 전 본문의 내용을 전혀 못느꼈습니다; 그냥 그렇게 만들고싶어서 만든 거 같아요. 사실 제가 박찬욱 감독을 사석에서 만나본 것도 아니고, 다섯 작품정도만 보고 알게된 사람인지라 모범생 컴플렉스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리플들을 읽으면서 문득 드는 생각이 만약 여성인 제가 만약 남성 동성애물을 만든다면 '작가의 성적 판타지를 연출했다'라는 말을 들을까 싶기도 하고... 저도 가끔 BL을 볼 때가 있는데 딱히 남자x남자에 대한 성적판타지때문이라기 보단 그 작품의 분위기나 스토리나 연출이나 그런 것들에 끌려서 읽게 되곤 하거든요. 그러니 만약 제가 어떤 남성동성애물을 각색하게 된다면 분명 그게 단지 남성동성애물이기 때문만은 아니겠죠. 특히 아가씨 원작이 된 핑거스미스는 단지 여자가 여자를 좋아하기 위해 좋아하는 류의 백합물이라기보단 스토리상 그 여자들이 서로 좋아하게 되서 만들어지는, 시대와 상황이 맞물리는 스토리상의 시너지가 있지 않나요.
ㅎㅎ 여성혐오영화인줄 아셨죠? 관객 기대를 배반하게 밑밥깔아요~~하기엔 너무나 잘 알려진 원작이 이미 아우라와 내용을 주고 있어서...그런 의도는 아닐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