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IDF] 어느 수도사의 대성당

2023.08.25 06:53

underground 조회 수:420

EBS국제다큐영화제(EIDF)의 [페스티벌 초이스]에 출품된 <어느 수도사의 대성당>이라는 다큐가 있습니다.  


아마도 이 다큐가 저에겐 올해의 EIDF 다큐멘터리가 될 것 같아요. 오랜만에 감상문을 쓰고 싶어졌습니다.  


수도원에서 쫓겨난 후스토라는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다른 수도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극단적인 행동으로 자신을 몰고 가서 주위에 민폐를 끼치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금식을 하다 몸이 나빠졌을 때 주위에서 그만두라고 말려도 듣지 않고 강행하다 결국 결핵에 걸리는 그런 사람입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는 그의 성격과 그 성격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그의 강하고 억센 말투 때문에  


그는 다른 수도사들과 원만하게 지낼 수 없는 사람, 수도원이라는 공동체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으로 간주되어 거부됩니다.    


수도원에서 쫓겨난 후스토는 아무런 건축 지식 없이 나이 30대부터 혼자 성당을 짓기 시작하는데 이 다큐는 60대부터 90대까지 그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60대가 된 그는 굵은 철근을 눈대중으로 조금씩 구부려 정확한 반원의 모양을 만들어 낼 수 있을 만큼 놀라운 기술자가 되어 있습니다. 


크레인이 필요한 높이의 건물 꼭대기에서 도르래를 사용해 필요한 자재를 끌어올리는 그의 모습은 홀로 고군분투하며 성당을 지어온 세월을 보여줍니다. 


그는 조각난 대리석 같은 버려진 건축자재를 최대한 이용하고 심지어 이웃이 갖다 준 수백 개의 낡은 테니스공에 시멘트를 부어 건물의 장식을 만들어 냅니다.  


모든 재료에는 다 쓰임새가 있다고 생각하고 주어진 소재를 창의적으로 응용하는 그의 모습에서 모든 존재에 대한 신의 섭리를 찾으려는 마음이 보입니다.  


그가 만드는 건축물에 호기심과 재미를 느껴 도와주러 오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렇게 다큐의 중반까지는 후스토가 수십 년동안 수공업으로 만들어 낸 건축물의 모습을 감탄하며 보게 됩니다. 


그러나 후스토가 수도원이라는 공동체에 받아들여지지 못한 사람인 것처럼 후스토의 대성당은 공동체에 받아들여지기 힘든 건축물입니다. 


그의 대성당은 단 한 번도 설계나 시공의 안전 진단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위험해 보이는 철근 사이를 안전모나 안전장치 없이 걸어다니는 그의 모습은 안전수칙 같은 건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아온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한 사람이 오랜 세월 지어온 거대한 건축물에 대한 경외심은 아무 건축 지식 없이 무모하게 지어온 불법 건축물에 대한 실망으로 조금씩 쪼그라듭니다. 


건축물은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을 따르고 그 구성원들에 의해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건축물로서의 유용성과 가치를 지니는데 


후스토의 대성당은 그런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구성원들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해 결국 성당으로 사용될 수 없는 무용한 건축물로 보입니다. 


한 인간이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대한 건축물에 감탄하다가 비전문가가 무대뽀로 만든 건축물은 결국 헛수고가 되는구나 씁쓸해집니다. 


이렇게 관객인 저는 대성당을 보며 이런 저런 감정들이 오르락 내리락 널뛰기를 하고 있는데 


이제 90대가 된 후스토는 그가 지은 대성당, 아직 완성되지 않은 대성당이 어찌될 것인가에 별로 연연해 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가 죽으면 대성당을 다른 사람이 완성시키는 것을 허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물음에도 그는 제대로 답하지 않습니다. 


그의 말년에 건축을 도왔던 한 사람은 후스토가 죽으면 대성당은 자신의 소유라고 침 튀기며 주장하는데 그 말에도 후스토는 가타부타 반응하지 않습니다.   


후스토는 한 번도 대성당을 자신의 것이라 생각한 적 없이 살아왔기에 그것을 누구에게 주느냐 마느냐, 다른 사람에게 완성하게 하느냐 마느냐는


그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후스토에게 대성당은 신의 것이니 신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그는 그저 아직 완벽하게 만들지 못해 강풍에 소실될 위험이 있는 대성당의 지붕을 보강했으면 하는 생각뿐입니다. 


그는 신에 대한 그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평생의 시간 동안 온 마음과 온 힘으로 그 성당을 지었습니다. 


누군가를 아주 오래 아주 깊이 사랑했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요? 후스토는 평생에 걸쳐 지은 대성당으로 그것을 보입니다. 


그는 수도원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았던 신에 대한 그의 사랑과 헌신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만들어 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60년의 세월 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대성당의 기둥과 벽과 지붕이 신에 대한 그의 사랑과 헌신의 증거입니다.   


성당이라는 결과물을 위해 성당을 지은 것이 아니기에 성당이 완공되느냐 되지 않느냐는 그에게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 대성당이 지금 당장 철거된다 하더라도 그는 이미 그가 보이고 싶었던 마음을 평생 동안 충분히 보였습니다. 신에게, 사람들에게, 자신에게... 


이 다큐를 보면서 한 사람이 평생을 바쳐 어디까지 만들 수 있는가에 놀라고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아무 쓸모 없는 것이 될 수 있음에 실망하다가      

 

사람이 살면서 정말로 원하는 것은 어떤 것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살아있는 동안 온 마음과 온 힘을 다해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것에 대한 나의 사랑이 어떤 물리적 형상을 이루어 그 사랑으로 살았던 내 삶의 증거가 되어 준다면 그걸로 됐다고, 그걸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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