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의 독자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디자인이 예쁘면 책이 많이 팔린다>.

그러다 보니 출판사 역시 디자인에 공을 많이 들이지요.

 

그 ‘공’은, 대개 앞서 성공한 책들을 따라가는 걸로 귀결되게 마련인데,

가령 소설 분야에서 <열린책들>이 성공을 거두자 많은 출판사들이 <열린책들> 디자인을 모방하기 시작했죠.

양장에, 한손에 딱 잡히는 판형, 파스텔톤, 기타 열린책들스러운 분위기가 그것입니다.

 

역사서를 전문으로 만드는 <푸른역사>가

그 분야에서 거의 최초로 본문 2도 편집을 시도하여 주목을 받자,

이후 비슷한 분야의 책을 만드는 출판사들이 너도나도 2도 편집을 시작했습니다.

 

일부 편집자들은 이런 흐름에 우려를 보냅니다.

디자인이 판매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겁니다.

실제로 조사해본 결과 디자인이 판매에 미치는 영향은

4%에 불과하다는 연구결과도 있다더군요.

 

문제는 디자인에 비용과 시간을 들이면

그에 따라 자연히 책의 정가도 올라가게 되고

그 부담은 독자들의 몫으로 남을 확률이 크다는 겁니다.

근사한 양장, 화려한 금박, 비싼 수입 용지, 캘리 등등.

 

그러니 거품을 빼자는 게 그 ‘일부’의 주장입니다.

양장은 불편하고 책값도 비싸다,

왜 출판사들이 외국처럼 문고본을 만들지 않는지 모르겠다,

...고 불평하는 독자들도 적지 않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여전히 많은 책들이 양장으로,

혹은 예쁘고 멋지게, 화려한 외양을 두른 채 서점에 깔려 있습니다.

그건 여전히 독자들이

<디자인이 예쁘면 책이 많이 팔린다>는 ‘미신’을 신봉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반드시 그 ‘한 권의 책을 팔기 위해’ 출판사가 디자인에 공을 들이는가 하면

반드시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당장 한 권을 팔 욕심(이 전혀 없다고는 볼 수 없지만)보다는

이와 같은 (일련의) 디자인이 출판사 이미지에 어떻게 영향을 끼칠 것인가.

 

‘디자인이 (당장의) 책 판매에 미치는 영향은 4%’에 불과할지 모르나,

디자인이 출판사의 이미지에 미치는 영향은 더 크지 않을까.

값으로 따질 수 없다, 운운하는 광고도 있습니다만,

그런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특히 제가 운영하는 출판사처럼 소규모 출판사들은 딱히 광고를 할 여력도 없고

대형서점의 매대를 가득 채울 이벤트 따위 꿈도 못 꾸니까,

어떻게든 ‘책 자체(디자인을 비롯한 책의 완성도)’에 신경을 쓰는 수밖에 없어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라고 얘기하면 조금 비참한 기분도 들지만,

대형 기획물이나 유명 저자의 신간과 ‘다이다이’로 붙어서 깨지지 않으려면,

도리가 없습니다.

 

야, 저 출판사는 책을 참 잘 만들더라(혹은 저 출판사는 디자인이 예뻐),

하는 독자들의 입소문만이 살 길이죠.

다만, 오바하지 말자, 는 생각만은 항상 하고 있습니다.

 

단도로 충분할 책을 4도 인쇄한다든지,

한 권으로 만들 수 있는 책을 행간 늘려 분권한다든지,

뭐 그런 것들은 욕 먹을까봐 겁나서라도 못해요.

 

얘기가 약간 옆길로 새지만,

이 과정에서 종종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바로 마감이 중요한가, 곤조가 중요한가, 하는 고민을 하는 거지요.

 

뭔 소리냐.

위에서 끼적인 표지 디자인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어디까지나 '예'입니다. 이상하게 유추하면 안 됩니다.

그냥 일반론이고, 그냥 예입니다.

 

A는 북 디자이너입니다.

마감을 잘 지킵니다.

책의 표지 디자인은,

컨셉을 잡고 이삼 주 후에 몇 가지 시안을 만듭니다.

 

그중 하나를 선택하고,

최종 결정 후 마무리 손질을 해서 완성합니다.

넉넉잡아 한 달쯤 걸린다고 보면 됩니다.

 

헌데 어떤 출판사가 너무 급해서 사흘 만에 표지를 해달라고 A를 조른 적이 있답니다.

문제는 마감을 사수하려고 A가 진짜 사흘 만에 만들어 줬다는 겁니다.

시간에 쫓겨서 그랬는지 결과물은 평범했던 모양입니다.

 

B도 북 디자이너입니다.

마감을 잘 지키지 않습니다.

어떨 때는 전화도 안 받습니다.

 

표지 시안 마감이 코앞에 닥친 편집자는 속에서 천불이 나는데

디자이너가 전화를 안 받습니다.

이럴 때는 디자이너를 확 죽이고 자기도 죽고 싶습니다.

 

B와 작업한 출판사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습니다.

두 번 다시 B랑 일하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헌데 그렇게 마감을 엄청 어기면서까지 고집스럽게 만든 표지 시안이,

이런 망할, 상당히 훌륭했기 때문에

나중에 보면 또 B랑 작업하고 있는 겁니다.

숨바꼭질은 여전했던 모양입니다만.

 

제일 좋은 건 마감도 잘 지키고, 결과물도 훌륭한 겁니다.

근데 그게 어디 쉽답니까.

맘대로 되면, 자기가 무슨 엿장숩니까.

엿장수 할아버지라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이때 차선책이 A와 B입니다.

마감을 지키고 일단 내자,

아니아니, 마감을 넘기더라도 결과물이 더 중요해.
 
세상에는, A 타입을 선호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작업의 종류에 따라 각각 다르겠지요. 
 
저는, 굳이 분류하자면 B 타입을 지향했던 것 같습니다. 굳이 분류하자면 그렇다는 겁니다, 굳이. 
 
그런데, 거기 당신. 이건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책 내용과 상관없이 디자인이 예뻐서 샀던 책, 혹시 기억나시면 한 권만 적어주십시오.

혹은 책 내용은 너무 훌륭한데 디자인이 후져서 사지 않았던 책, 기억나시면 한 권만 ㅎㅎ.

 

덧) 마감시한을 넘긴 책 때문에 골머리를 앓다가 주저리주저리 장타로 글을 읊조려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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