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토피아>를 마냥 선의로 받아들이기에는 결정적인 걸림돌이 있습니다. 편견과 차별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작품 속 세계에서는 갈등이 이미 해소가 되버렸다는 설정 때문입니다. 육식동물이 초식동물을 잡아먹어서 초식동물들이 일방적인 공포를 느끼며 살았다는 설정이, 영화 속에서는 이미 완벽하게 정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육식동물과 초식동물 사이의 생명이 걸린 위협은 쥬디가 활약하는 현재시간대에서는 더 이상 벌어지지 않습니다. <주토피아>의 이 평화로운 세계의 설정은 현실의 세계에 인용하기에 너무나 부정확합니다. 현실에서는 그 어떤 차별도 완전하게 해소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트럼프 에이지를 지나며 그 모든 차별은 더 극심해졌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닉이 대변하는, 과거에는 위험했으나 현재는 완전히 평화적이고 협조적인 시민의 존재는 현실의 은유가 아니라 판타지에 더 가깝습니다. 현실에서 차별의 맥락은 끊긴 적도 없고 차별의 주체가 사회적으로 완벽하게 개과천선한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집단을 차별주의자로 일단 인식하는 것은 차별이 아니라 오히려 정확한 사회인식에 더 가깝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이걸 문제삼습니다.


<주토피아>에서 육식동물의 본성은 강제로 주사한 약물에 의해 발생합니다. 이들이 과거의 흉폭한 차별주의자로 돌변한 것은 온전히 호르몬이나 두뇌를 통제당하는 과학적인 현상이죠. 그러나 실제 차별은 그렇게까지 과학의 힘을 빌어서 복잡하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떤 약자들은 게으르고 거짓말을 하는 도둑들이다, 라는 식으로 혐오를 정당화하는 기제가 사회적으로 퍼질 뿐입니다. 차별은 사회적 전파를 통해 개개인이 충분한 이성을 가지고 본인의 혐오를 맹신하며 벌어집니다. 작품에서처럼 완전한 비이성적, 통제불가의 상태에 빠지는 게 아니라 어찌되었든 사고와 결심을 거쳐 언행을 집단적으로 저지르는 지적인 행위입니다. 약물을 주사해야 공포와 혐오를 다시 전염시킬 수 있다는 이 영화의 설정이야말로 세계를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죄없고 선량한 (육식)동물들을 다른 시민들이 선동에 빠져 차별한다는 영화의 내용은 비현실적입니다. <주토피아>를 현실로 그대로 옮기면 너네 초식동물들은 약하고 다른 동물들을 몰래 괴롭히는 비열한 존재들이니까 우리의 응징을 기꺼이 받아야한다는, 육식동물들의 위선과 폭력이 주 내용으로 나와야 할 것입니다. 현실에서는 그 갈등이 사라진 적이 없고 늘 일방적인 가해와 피해만이 존재하니까요. <주토피아>는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이 선량한 시민이지만 어느 한 쪽의 과도한 불안과 의심 때문에 똑같은 다른 시민을 "무고한다"는, 그런 차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인권 이슈가 터질 때마다 가해자를 대변하는 쪽에서 숱하게 오용되곤 했습니다. '우리는 닉이다, 그런 우리를 왜 일반화하고 그렇게 가해자라고 지목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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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영화의 이 묘사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현실과의 괴리감이 큽니다. 아무리 차별의 역사가 끝났고 육식동물들이 초식동물들과 공존하는 시대에 이르렀다 할 지라도 이 시점에는 과거의 폭력적인 역사가 되풀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설령 약물에 의한 통제라 해도 그렇습니다. 육식동물로서 덩치도 훨씬 크고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이 있는 닉이, 쥬디를 그렇게 위협하는 시늉을 하면 안됐을 것입니다. 자신보다 훨씬 강한 자가 아주 구체적인 신체적 위협을 가하고 있는 (영화는 카메라를 아래에서 위로 올려비추며 닉의 지배적인 위치를 분명히 상기시킵니다) 상황에서도 쥬디가 안심하고 그 어떤 자기보호 반응도 보이지 말았어야 한다고 하는 건 너무나 부자연스럽습니다. 강자의 장난과 잠깐의 감정적 반응에도 약자는 무조건적인 신뢰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게 바로 권력의 차이니까요. 닉이 완벽하게 무고한 상황에서도 쥬디가 불안해하는 건 차별의 맥락에서 필연입니다. 그런데 닉은 오히려 강자로서의 폭력을 드러내면서 약자로서의 쥬디를 위협합니다. 이 영화가 오해와 편견으로 인한 차별을 다루고 싶었다면 닉이 저렇게까지 당당하게 자신의 강자성을 남용해서는 안됐을 것입니다. 쥬디는 훨씬 더 사악하고 자기중심적이어야 했겠죠.


<주토피아>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차별의 맥락이 성차별과 인종차별이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 영화는 성차별을 은유하는데는 실패하고 있습니다. 남성중심적인 관대함의 요구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평등을 지지하고 나쁜 사람은 되지 말아야겠다는 선의를 갖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 만들어진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나 빠르게 실체를 드러냅니다. 트럼프 한명이 골고루 자백하고 부활시킨 차별은 그 어떤 주사보다도 효과가 강력했습니다. 영화가 조금 더 나은 상황을 그리면서 조금 더 나아가자는 이야기는 오히려 우리는 이렇게 착하고 안전한데 왜 우리만 가지고 들볶느냐는 부작용만 키웠습니다. 


어쩌면 지금의 현실을 조금 더 정확하게 그려내기 위해 <주토피아>는 속편이 나와야할지도 모릅니다. 닉이 쥬디에게 화를 내면서 자기도 모르게 발톱으로 할퀸다면? 은연중에 토끼는 바보라는 편견을 계속 말한다면? 나는 육식동물이라고 이렇게 괴롭힘을 당했다는 자기연민만 계속 말한다면? 그때에 <주토피아>는 조금 더 현실적으로 정교한 우화가 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일차원적인 선악의 이분법을 뛰어넘었다는 이야기는 지금의 현실에는 너무 과분합니다. 차별을 하는 쪽이 차별을 당하는 쪽에 계속 자기반성을 요구하니까요.


<주토피아>가 최대한 현실에 근접하는 차별의 맥락이라면 아마 제노포비아가 아닐까요. 그럼에도 그 차별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방법은 더 이상 저 사람들은 어떤 위험한 요소도 없고 그 사람들을 위험하다고 하는 게 틀렸다는 주장이 아니라, 우리 편도 똑같이 위험한 사람들이고 오히려 상대방만을 위험하다고 몰아가는 그 편향적인 시선을 짚어내야 할 것 같습니다. 원래는 <주토피아>를 좋은 이야기로 계속 감상할 수 있는 정치적 독해법을 찾고 싶었지만 그게 너무 어려운 시대라는 생각만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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