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빙

2021.01.20 10:06

Sonny 조회 수:376

20210113-134859.jpg


눈은 녹는 것일까. 어쩌면 그 표현은 아름다움을 희망하는 우리의 잔인한 무관심일지도 모른다. 형체의 부분부분이 증발되어, 어떤 소음도 부산물도 없이, 하늘로 사라져버리는 그 존재론적인 실종의 광경은 곱디 곱다. 단단했던 얼음에서 부드러운 물로. 힘이 빠지고 조금 더 편안해지는 것 같은 이 변화의 과정이 정말로 맞는지 의심해본다. 얼음이었던 것은 고요하게 물이라는 시체가 되는가. 조각이었을 때의 그 미세한 광경 속에 얼음이 내지르는 비명은 감춰져있는 것은 아닐까.

모든 눈은 부숴진다. 물이 되면서 얼음이었던 부분이 떨어져나가면 그 빈자리는 온전했던 지난 형태를 암시한다. 가장 바깥에서부터 천천히 물이 되어 흐르고 매끈해지겠지만 그것은 단지 탄력을 잃은 물의 주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르고 냉기를 잃어가며 생긴 물이 표면부터 얼음을 문질러 깎아낸 자국이다. 그 힘이 아무리 지긋해도 결국 눌리고 떼여저나간다면 그것은 파괴가 분명하다. 가끔은 세계 앞에서 쓸데없이 거대한 우리가 그 변화를 무디게 포착하고 감상에 젖을 뿐이다. 얼음은 축소되지 않는다. 온기라는 끌과 정이 아주 작은 부위에서부터 보이지 않게 쳐내려서 투명한 피를 흘리게 만든다.

개미의 시체는 그냥 자국이지만 고양이의 시체는 비로서 죽음을 신호로 보낸다. 눈의 사망은 덩어리로 있어야 알아볼 수 있다. 눈송이는 깜짝할 새에 소멸하지만 얼음이라는 단위가 붙을 정도의 덩치가 있으면 비로서 파괴가 관측된다. 북극의 얼음들은 그냥 녹는 게 아니라 분해되어 사방에 흩어져있다. 쪼개지고 갈라진 것들이 겪었을 진통이 그 조각조각에 새겨져있다. 셰계의 변화는 늘 부숴져버리는 것과 사라져버리는 것 두가지밖에는 없다.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는 커다랗고 선명하게 존재해야 한다. 그저 입자로 존재하고 간신히 결정을 이루는 규모로는 모든 것이 생략된 채 제멋대로 승천할 뿐이다.

빠른 속도의 시간 속에서 모든 눈은 "어느새" 사라져있다. 그것은 단지 깨끗하고 단단하게 있을 때만이 기억된다. 얼어붙은 강으로 기억되던 그 눈들은 어찌되었을까. 세계의 표면에서 단단히 가장자리를 이루고 있던 이들은 깨지고 갈라지고 녹아서 없어진다. 수면 아래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눈이었던 기억과 수면 위에서 고체를 이루고 있던 기억마저 모두 잊혀지고 하나의 물이 될 것이다. 온화한 빛과 성실한 시간 아래 강과 세계는 제 모습을 찾는다. 눈은 그저 기억 속에서만 다정하게 기다려질 것이다. 그리고 다시 내리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금이 가고 바스라지면서 파괴될 것이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채, 혹은 아름다움만 떠올리며 잊혀진 채. 세계는 언제나 존재한다. 부숴지는 것은 늘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으니까.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32370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51424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61740
114780 [넷플릭스바낭] 대만제 환타지... 를 빙자한 멜로물 '미래상점'을 봤습니다 [6] 로이배티 2021.02.05 1320
114779 판사는 신이 아니다 [5] 사팍 2021.02.05 604
114778 [주간안철수] 안철수 대표 여론조사 3등... (....) [6] 가라 2021.02.05 769
114777 [펌글] 벌거벗은 세계사 다시 논란…설민석이 문제인 줄 알았더니 [14] Bigcat 2021.02.05 1232
114776 정신없는 금요일이네요 [3] 미미마우스 2021.02.05 381
114775 거리두기의 금요일... [1] 여은성 2021.02.05 351
114774 한국의 뛰어난 에세이스트는? [31] 어디로갈까 2021.02.05 1297
114773 [초바낭&탑골인증]칠리칠리란 과자 아시나요? [5] 쏘맥 2021.02.05 686
114772 내일 승리호가 넷플릭스 개봉을 합니다. [4] 분홍돼지 2021.02.04 738
114771 1917(2019) [2] catgotmy 2021.02.04 315
114770 <유전> 같은 영화가 보고 싶네요 [4] 고요 2021.02.04 644
114769 그 해고자 쎄다 [3] 사팍 2021.02.04 646
114768 윤여정님 엄청 멋지지요. [16] Lunagazer 2021.02.04 1131
114767 바낭 - 끝난 겁니까? 아버지? [4] 예상수 2021.02.04 462
114766 류호정의 오판과 사과 그리고 결전의 변 [19] soboo 2021.02.04 1432
114765 미쓰고 재밌게 보신분 계신가요? [2] 왜냐하면 2021.02.04 307
114764 <알프레드 히치콕 극장>과 <환상특급> [2] daviddain 2021.02.04 285
114763 이런저런 사우나 잡담... 여은성 2021.02.04 330
114762 한일해저터널?? 노망난 김종인, 자멸하는 국힘, 얌체같은 민주당 [8] soboo 2021.02.04 805
114761 [유튜브 생중계] 대관령 음악제 2/5~2/7 [8] underground 2021.02.04 23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