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팽 붐은 올까...에 대한 단상들

2021.01.16 05:27

여은성 조회 수:757


 1.어렸을 때 아르센 뤼팽 모음집이 있어서 읽곤 했어요. 뭔가 남자의 로망으로 똘똘 뭉친 듯한 짓만 해대는 뤼팽의 이야기가 너무 재밌었죠.


 하지만 좀 커서 생각해 보니 뤼팽은 매우 허술한 이야기인 거예요. 뤼팽은 무언가를 훔치거나 심심풀이로 남을 도와주거나 경찰이 해결하지 못하는 사건을 해결하거나 어딘가로 모험을 떠나는 걸 반복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것 중 무엇 하나 제대로 된...현실적인 이야기가 없어요. 범죄를 저질러도 제대로 된 범죄극이 아니고 사건을 해결해도 제대로 된 추리가 없어요. 무언가를 훔치거나 탐험을 해도 제대로 된 모험물도 아니고요. 


 나이가 들고 다시 보니 재미를 떠나 뤼팽이 벌이는 일들은 너무나 허술하기 때문에 '활극'이라고 분류했어요.



 2.왜냐면 뤼팽이 살아가는 세상은 뤼팽을 띄워주기 위해 이런저런 손질이 되어 있거든요. 뤼팽 이외의 사람들-어쩌면 뤼팽까지도-은 전혀 똑똑하지 않고 살벌하지도 않아요. 프랑스 최고의 민완 형사라는 가니마르가, 제리가 톰을 가지고 놀듯이 뤼팽에게 다뤄지는 게 뤼팽 월드의 실상이죠. 뤼팽을 몇년에 한번 만나기도 힘든 부하들-물론 매우 유능한-은 그에게 무조건적인 충성과 신뢰를 보내고요. 뤼팽의 로망이 쉽게 쉽게 실현되도록 설계된 세상에서 뤼팽 혼자서만 훨훨 날고 있는 거예요.  


 생각해 보면 이건 말도 안 돼요. 그 젊은 나이에 엄청난 부를 이룩하고 그렇게 큰 조직과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관리하고 파리에 미로같은 길을 파놓는다는 게 말이예요. 그만한 범죄 조직을 만들어놓고 인신매매나 마약 따위엔 손대 안 대고 있는데, 그렇게 많은 고용인과 그에 딸린 군식구들을 불만이 안 나오게 뤼팽이 다 책임져주고 있다? 뤼팽이 뤼팽 급 범죄자의 아들이라서 그것들을 물려받은 금수저라도 고개가 갸우뚱거릴 판에, 뤼팽은 이 모든 걸 개천에서 태어나 젊은 나이에 다 해냈어요.  



 3.하지만 뤼팽의 개성이 그거잖아요. 어느정도의 허술함이 있기 때문에 또 나름대로의 낭만과 여유가 느껴지는 거죠. 007과 마찬가지로요. 조금 덜 빡빡한 세상에서 조금은 덜 철저한 악당들을 해치우며 낭만과 멋을 보여주는 이야기들도 나름의 맛이 있긴 있어요. 


 문제는 사람들의 머리가 커지면서 이런 것들이 먹히지 않게 되었다는 거예요. 마치 주인공 한 명을 띄워주기 위해 마련된 듯한 허술한 세계관...뭔가 디테일하지 않은 묘기와 말도 안 되는 비밀의 문들이 매번 등장하는 것을 보면서 계속 드는 의문과 짜증을 참아줄 수가 없게 된 거죠.


 그래서 007은 살아남기 위해 현실성을 대폭 올렸어요. 주인공을 봐주지 않는 살벌하고 철두철미한 적들, 그에 맞춰 여유 없고 무자비해진 주인공을 기용해서 재미있는 액션 첩보 영화로 재탄생시켰어요. 다만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게 007이냐 제이슨 본이냐'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어야 했죠.



 4.휴.



 5.문제는, 뤼팽을 현대물로 만들려면 007에서 기름을 뺀 것보다 한 100배 정도는 더 기름을 쫙 빼야 한다는 거예요. 뤼팽을 아주 그냥 비틀어 짜야 하는 거죠. 한데 007이나 뤼팽 같은 이야기를...굳이 명맥을 잇기 위해 작품의 테이스트를 버려야 할까요? 뤼팽을 그렇게 마개조해도 여전히 그 배는 테세우스의 배일까요? 잘 모르겠네요.


 물론 나도 현대물로 각색된 뤼팽을 보고는 싶어요. 라이벌인 셜록은 리메이크되며 잘 나가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영상물로 만들어지면 뤼팽은 어쩔 수 없이 편집증적인 캐릭터가 될 수밖에 없거든요. 과거를 배경으로 했을 때도 어떻게 안 잡힐 수 있는지 의심스러웠잖아요. 한데 감시와 추적 기술이 차원이 다른 현대에서 루팡짓을 하려면 편집증적인 성격에 컴퓨터에 빠삭한 it전문가여야 하는 거예요. 현대에 와서도 뺀질거리면서 그러고 다니면 뤼팽의 루팡짓은 10분 안에 막을 내릴 테니까요.



 6.어쨌든 드라마나 영화, 뮤지컬로 재탄생되어서 또다시 인기를 누리는 셜록과 달리 뤼팽은 별 소식이 없어요. 그야 뤼팽이 현대물로 나오기 힘든 이유는 원작이 허술해서만은 아니겠죠. 뤼팽과 셜록의 차이는 허술하냐 안 허술하냐의 차이보다는 탐정과 괴도의 차이라고 생각해요. 


 수사관은 100번 중에 99번 실수해도 한 번만 잘하면 범인을 잡을 수 있지만 범죄자는 100번의 액션 중에 99번을 완벽하게 행동해도 단 한번의 실수만 하면 그대로 게임 끝이니까요. 셜록의 경우는 좀 사회성 모자라고 탐정짓 외의 다른 부분에선 능력치가 떨어져도 되지만 뤼팽은 모든 부분이 완벽해야만 이야기가 되거든요. 그래서 현대물 뤼팽을 만들긴 매우 힘들지 않을까...싶어요.



 7.사실 내가 만든 버전의 뤼팽도 있어요. 저작권이 끝나서 내 버전의 셜록을 구상해둔 것처럼 당연히 뤼팽도 있는 거죠. 한데 내가 만든 버전의 뤼팽은 어번 판타지를 배경으로 한 supernatural한 존재예요. 셜록은 인간이지만 뤼팽은 도저히 인간으로 못 만들겠더라고요.


 왜냐면 그렇거든요. 내가 보기에 현대에서 뤼팽이 뺀질거림과 낭만을 잃지 않고 뤼팽으로 있으려면 최소한 뱀파이어거나 마법사쯤은 되어야 하니까요. 그냥 인간이면서 루팡짓을 하고 다니려면 편집증적인 성격에 컴퓨터 잘 다루는 너드여야 스스로 납득이 될 것 같아요. 하지만 그렇게 만들면 해킹 잘 하는 현대판 로빈 후드가 될 뿐이겠죠.


 이번에 넷플에서 뤼팽이 나왔던데...영드나 미드로 나와주길 바라며 글을 써 봤다죠. 영화로 만들 거면 아예 다크 유니버스로 나오면 재밌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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