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원더풀 모먼트

2019.12.31 20:58

Sonny 조회 수:469

평어체로 씁니다... 양해 바랍니다


https://youtu.be/Wtd6DvLoCsU


네이버 블로그가 물어봤다. 2019년 가장 좋았던 순간은요? 한 해의 가장 좋았던 순간이 이렇게 명확히 떠오르는 해가 또 있으려나? 몇년간 거지발싸개 같은 순간의 총합 가운데서 그나마 영화 뭐 봤을 때, 혼자 어디 어쩌구를 걸었을 때 이딴 대답이나 하던 게 일상이었는데. 좋았던 순간이란 게 뭔지도 모르겠는 그런 해만 보내다가 주관식 10점짜리 정답을 딱 건진 해가 찾아오니 좀 신기하다. 뭐 많고 많은 즐거운 순간이 있었다. 대전에서 누가 뿅 하고 올라왔던 순간도 그렇고 10년만에 누가 연락을 한 것도 그렇고. 아무튼 다 뭐 이런 순간이 다 있나 싶었지만 대망의 1위는 그렇다.


5월달에 퀴어 퍼레이드에 참석한 순간! 느낌표를 안붙이면 감정이 성립이 안된다. 쩜쩜쩜과 물음표로 점철된 한 해에서 느낌표를 삼백개 정도는 세워놓을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을 떠올리면 본 투 비 블루인 나는 저게 설마 내 인생의 절정은 아니겠지 싶어서 괜히 가라앉을 정도다. 내년 퀴어퍼레이드는 어쩌나 싶어 벌써 걱정이다. 벌써부터 내 미래에 초를 치긴 싫지만 내가 아무리 까불려고 해도 그 때만큼 흥이 날까 걱정이 앞선다. 제주도에서 말이라도 한 마리 공수해오지 않는 이상 그 신나는 순간은 전혀 갱신될 것 같지가 않다. 


저렇게 써놓으면 퀴어 퍼레이드 도중 혐오자들 한 세명을 사냥해서 목이라도 벤 것 같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그냥 퍼레이드를 보기 전에 와인을 까고, 퍼레이드를 하면서 와인을 까 마시고, 퍼레이드가 끝나고는 뱌뱌 하면서 헤어졌다. 끗. 그런데 나는 그 전까지는 매년 퀴어 퍼레이드에 혼자 갔다. 맨 처음에는 남초 커뮤니티에서 출이 어쩌고 일반인들이 어쩌고 떠드는 꼬라지들이 싫어서 일대백 키배를 뜨다가 갑자기 현타가 와서 혼자 갔다. 이 놈들한테 백마디 떠들어봐야 뭔 소용일까 싶어서. 키배를 하든 말든 그냥 갔다온 후기를 올렸다. 효과는 굉장했다...! 퀴퍼 반대자들을 성소수자 차별자로 몰아가지 말아주세요 하면서 울어제끼는 글이 올라왔다. 그 흐느낌이 하도 간곡해서 퀴퍼를 반대하는 인간들까지도 의아해했다. 누가 누굴 몰아가는 글을 썼나요? 빙빙 돌려서 말하는데 퀴퍼에 안 간 네놈이 양심에 찔려한다는 건 너무 잘 알겠구나~ 딱히 놀릴 생각도 없었는데 놀려먹지 않고는 못배길 글을 올리는 통에 한참을 웃었다. 그 다음 해에도 가고 그 다다음 해에도 갔다. 근데 세상 아싸 파티면서 인싸 파티를 혼자 가려니까 나중엔 쪼끔 지겨웠다. 그래서 올해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랑 갔다. 다들 좋은 사람들이었다. 내가 제일 별로인 인간으로 밝혀지는 이 반전이 슬프고 속상했다. 그런데 아무튼 그 때는 매우 행복했다.


만반의 준비를 다 해갔다. 와인도 싸가고, 치즈도 싸가고, 마른 안주도 싸가고, 와인 잔도 싸가고, 깔개도 싸가고. 유난은 떨고 볼 일이다. 아마 그 순간부터였던 것 같다. 와인사랑의 깨달음이 시작된 순간. 쏘주를 극혐하고 맥를 그냥혐하는 내가 이상하게 와인은 술술 잘 넘긴다는 걸 알게 된 건 좀 시간이 흐른 후였는데, 와인 무제한 뷔페에서 촌놈답게 잔 가득히 와인을 따라서 자리로 갖고온 만행을 한 다음인지 퀴퍼에서 와인을 마시는 게 나에게 매우 자연스러웠다. 주님의 피가 막 도는구나... 한강 대교 아래에서 BTS 노래 들으면서 괜히 깝치다가 다음 3일 동안 무릎을 절뚝거려야했던 순간보다 더 신이 났다. 살다 보면 별거 아닌데 그냥 정신적 코카인을 때려박은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런 잠깐의 조증은 괜찮잖아... 누군지 생각은 안나는데 랩퍼 누가 공연하는 걸 와인 홀짝이면서 보고 있으니까 마구 행복했다. 동행자들은 나의 취기에 슬슬 당황하면서 초면에 면박을 주기 시작했는데 나는 또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 왜 저래 진짜 온몸으로 던지는 이들의 제스쳐를 무시하고 퀴어킹처럼 혼자 막 신을 내버리고... 돌이켜보면 미안한데 그건 정말 불가항력의 상황이라 좀 양해를 구하고 싶긴 하다. 당신들도 내가 되어봐요! 신이 나는지 안나는지!


퀴어퍼레이드가 쓸데없을 정도로 흥행해서 사람은 바글거리고 쇼핑도 제대로 못했다. 그런데 행진은 즐거웠고 처음 본 사람들과 뭔가 정치적 액션을 같이 한다는 게 좋았다. 이 때의 기분이 하도 강렬해서 그 다음에도 혹시 만날 일이 있으면 그냥 그 순간의 리플레이 같고 그랬다. 만나기 전에 내가 너무 기대를 해서 내가 그 기대를 다 박살내는 만행을 저지르긴 했지만... 아무튼 그런 순간을 가능케 했던 건 이 듀나게시판이라는 공간이고 하도 고마워서 듀나님이 쓴 민트의 세계 책도 샀다. 그 때 퀴퍼에서 봤던 사람들이 나보다 책도 많이 읽고 성숙한 인간이라 나도 올해부터 독서를 다시 시작하게 된 것도 굉장한 성취였다. 듀게를 오래 하면 퀴퍼도 같이 할 수 있고 책도 읽고 뭐라도 쓰고 와인도 미치광이처럼 마실 수 있고 그렇다. 


내가 받은 이 좋은 기억을 어떻게 하면 보답할 수 있을려나. 다들 너무 안바빴으면 좋겠고 그래도 건강했으면 좋겠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괜히 또 혼자 벼르고 있는 중이다. 아니 그걸 어떻게 잊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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