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3 10:57
며칠 걸려서 봤습니다.
맷 데이먼 주연의 영화는 특별한 개성이 없고 그냥 미국영화의 평범함을 느껴서인지 기억에 남지 않았습니다.
알랭 드롱의 [태양은 가득히]는 최근에 본 건 아니지만 몇 번 봤고 어릴 때 처음 보고 넘 좋아한 영화입니다. 처음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좋았습니다.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마음 속의 추억의 영화 리스트에 들어가는 영화네요. [태양은 가득히]는 음악, 장소들, 인물 형상화, 배우 이 모두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리플리의 젊음과 가난과 저질스러움까지 뒤로 가면서 연민으로 이입하게 하는 면이 있었어요. 이상 심리의 소유자가 이십 대 알랭 드롱의 외모를 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했겠지만 이외의 영화의 요소들도 태양처럼 반짝반짝.
저는 하이스미스라는 작가를 모를 때 이 영화의 원작이라서 동서에서 나온 소설을 읽었고 시간이 지나 원작자를 알게 된 후 그책 출판사 리플리 시리즈를 구매해 읽었지요. 이 시리즈는 번역에 문제가 많아 말이 있었고 저도 읽으면서 오탈자가 심해서 어이없어 했었어요. 을유로 출판사를 옮겨 작년에 시리즈가 새옷을 입고 나왔는데 이번 번역자도 좀 안 좋은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번역 자체는 안 읽어서 모르겠네요.
이번 넷플릭스 시리즈가 이야기 진행상 이전 작품들과 눈에 띄게 차이나는 점은 다른 분들 글에도 나오지만 리플리의 나이가 많다는 것이네요. 그래서 드라마의 성격도 달라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리플리는 이탈리아에 오기 전부터 완성형 범죄자에 가깝습니다. 미국에서 이런 기회가 주어졌다면 진작부터 시도했을 것입니다. 디키의 리플리에 대한 경계나 차별이 두드러지지 않아요. 물론 처음에 경계하지만 사람이 좀 무릅니다. 욕망에 비해 능력은 없어서 자신감이 없고 칭찬에 목마른 평범한 인물입니다. 리플리의 신경을 건드리고 자극하게 되는 심리적 원인이 디키라고 보여지지 않아요. [태양은 가득히]의 그 디키만큼의 재수없음이 없습니다. 이번 시리즈의 리플리 경우, 그 나이에 차별 좀 당하고 소외시킨다고 상처받는 내용이 두드러지면 더 이상하겠죠. 이미 많은 일을 겪었을 나이 같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선량한 디키가 사이코 범죄자에게 희생되었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이 점은 아쉬웠어요. 비행기와 기차와 배를 타고 달려온 미국인 범죄자에게 다만 아버지 덕에 놀고 먹는다는 이유로 단죄되네요? 하지만.
나이가 있는 리플리는 디키에 의해 상처를 받지 않는 대신 문화적인 여유와 문화적인 충격에 지배당하는 식으로 전개됩니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해안 마을, 예술품으로 도배된 건물들과 산재한 유적지, 액자에도 안 넣고 아무렇게나 걸려 있는 피카소의 그림. 그렇습니다, 리플리 씨는 범죄자이면서 예술에 영향을 받는 사람이었던 것이죠. 이걸 누리고 싶은 겁니다. 어찌 좀 수중에 넣고 싶은 것입니다. 재능도 없으면서 허접한 그림과 허접한 글쓰기에 매달려 무슨 큰 일이라도 하는 양 시간을 죽이는 디키와 마지 대신 자신이 좀 누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17세기 초의 화가 카라바조에 이입합니다. 이 화가는 지인을 죽이고 도망자로 다니며 여기저기에 위대한 그림들을 남겼다고요. 위대한 인물은, 예술가는 친구를 죽이는 것 쯤은 문제가 안 된다,라고 카라바조의 그림을 찾아가 바라보는 리플리의 얼굴에 자기식으로 흡수하는 게 보입니다. 자신을 예술가로 여깁니다. 재능있는 리플리 씨입니다. 우리는 마지의 수준 이하 글을 참고 읽으며 더 낫게 교정하는 것을 보며 확인할 수 있어요. 재털이 하나도 얼마나 아름답고 견고한 걸 고르던지. 하여튼 보트에서의 살인 장면에서 눈하나 깜빡이지 않고 기계적으로 움직였습니다.
이 시리즈에서 추구하는 것은 60년대 초반의 발에 차이는 게 예술품인 이탈리아 곳곳의 수려함을 흑백의 예술적 화면으로 제공하겠다,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사실 이 부분을 즐겼습니다. 리플리가 자기 범죄 행위에서 무사히 빠져나가고 성공적인 신분 세탁을 한다는 결말은 알고 있는 것이니까요. 거의 그림 같은 구도의 장면들의 향연이 펼쳐지니 느릿느릿 이런 것을 구경할 마음으로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2024.04.13 17:31
2024.04.13 19:37
을유출판사에서 작년에 새로 나온 시리즈는 번역 자체가 이상하다는 말은 못 들은 것 같습니다. 시도해 보셔도 될 듯해요.
'리플리 증후군'이라는 말까지 나온 캐릭터라 이 인물의 정체성에 대한 기본 기대값이 있지 않나 합니다. 젊은이가 흉내 내기나 허구로 자신을 만들어 나간다는 점, 계급 갈등이 중요하다는 점 같은 부분 말입니다. 이번 시리즈는 주요 인물들 연령대가 높아지면서 디키의 존재감은 약하게 하고 대신 화가 카라바조의 영향력을 많이 키웠네요. 원작이나 영화 [태양은 가득히]의 이미지와 상당히 멀어져 있는 건 분명하므로 이전 작의 팬들에겐 실망을 주기도 했나 보네요?
카라바조가 소설에 등장한 기억은 없습니다. 근데 근래 저의 기억을 믿을 수 없네요.ㅎ 하여간 디키와 리플리가 구경 다니다 보았을지도 모르겠으나 분명한 것은 원작에서는 리플리의 타고난 자질에다가 영향을 끼치고 자극을 주고 갈등의 기름을 부은 것은 디키입니다.
2024.04.13 23:54
뜬금 없지만 이 글이 참으로 반가운 것이... 저도 밍겔라의 리플리는 별로였거든요. ㅋㅋㅋ 비평도 아주 좋았고 보고 온 지인들도 다 호평이라 저만 취향이 이상한 것인가!! 라고 생각하며 억울해 했던 추억이 있습니다. '태양은 가득히'가 훨씬 좋다고 이놈들아!! 라고는 차마 말 못하고 '난 예전 버전이 더 재밌었지만...' 이라고 소심하게 얘기했죠. 하하.
근데 본지 오래되어서 '태양은 가득히'의 결말이 가물가물한데, 마지막에 마치 경찰에 잡히는 것 같은 암시로 끝나지 않았나요? 시체가 그물에 걸려 올라오고, 럭셔리하게 놀고 있던 리플리에게 누군가가 찾아와 문을 두드리던가 그랬던 것 같은데. 전 그게 당연히 경찰일 거라 생각했어요.
2024.04.14 10:06
밍겔라의 리플리는 무난하게 잘 만들어 그런 것 아닌가 해요. 주인공부터 심하게 무난합니다.ㅎ
맞습니다. 원작 소설과 결말이 다른 작품이죠. 시체 묶은 줄이던가가 배 바닥에 걸려서 배와 함께 해안으로 들어와서 발견되니까요. 유명한 장면인 비치의자에 앉아 칵테일인지를 마시며 그래 이 맛이야, 하고 있는 리플리에게 경찰이 찾아 옵니다.
2024.04.14 13:21
솔직히 알랭 들롱의 리플리를 기억하다가 맛 다몬씨가 그걸 연기하는 걸 보니 그 순간 이미... ㅋㅋㅋ 오히려 디키가 절세 미남이라 이게 뭔가... 싶었는데요. 뭐 남의 신분 훔쳐서 살아야 한다는 리플리의 조건을 생각하면 알랭 들롱 얼굴이 오히려 에러인 게 논리적인 얘기겠습니다만. 그래도 이미 깊숙히 박혀 버린 이미지가 말입니다. 하하.
2024.04.14 13:53
ㅎㅎ 그렇습니다. 논리를 떠나서 결말도 원작과 달랐지만 하이스미스 작가는 이 영화에 만족했다는 걸 어디서 읽은 거 같아요. 그 시절 알랭 들롱의 비주얼은 모든 걸 잡아먹는... 오늘날 이 배우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참 인간이란 싶고 뭔가 한탄이 나오죠.
2024.04.14 17:06
빔 밴더스 감독의 '미국인 친구'에서는 무려 데니스 호퍼가 리플리를 연기한 적도 있죠. 알랭 들롱, 맷 데이먼, 존 말코비치도 나름 각자 다르게 해석하긴 했었지만 이 버전은 정말 충격이었어요. 놀랍게도 원작자 패트리샤는 리플리 캐릭터의 본질을 꿰뚫었다며 빔 밴더스에게 직접 칭찬하는 메시지를 보냈었다네요.
2024.04.14 19:30
존 말코비치 나온 '리플리의 게임'은 봤는데 데니스 호퍼는 이 역할을 한 줄도 몰랐어요. 두 배우 다 원작 시리즈 중 세 번째 책으로 만든 영화네요. 신분 세탁 후 수 년 세월이 흘러서 나이가 좀 든 리플리라 둘 다 잘 했나 봅니다. 빔 벤더스 감독 영화도 보고 싶네요.
2024.04.14 19:15
'태양은 가득히'를 보면서 놀랐던 건 알랭 들롱이 미남일 뿐만 아니라 연기도 꽤 잘하더란 겁니다.
그리고 얼굴 뿐만 아니라 선명한 복근까지....지금 기준으로 봐도 정말 매력적인 비주얼....
2024.04.15 10:13
앗 thoma님 덕분에 넷플릭스로 리플리가 나왔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이 드라마 제작사를 별로 좋아하진 않아서 볼 지 안볼지 모르겠습니다 알랭 들롱의 영화도 워낙 인상이 세고...
이 작품은 아비투스라는 개념을 공부하기 참 좋은 교재라고 생각하는데, 이 전작들보다 물욕은 배제하고 문화적 계층 상승의 욕구가 더 두드러지나보네요? 흥미롭습니다
2024.04.15 11:04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는 읽고 싶은데 2005년 번역작이라 새로 나오지 않을까 해서 읽기를 주저하고 있습니다. 하비투스 개념은 정확하게 모르지만 얼마전에 읽은 부르디외 대담책에서 '과거로부터 꾸준히 축적된 성향체계' 라고 짧게 정리할 수 있더군요. 이 대담 책도 어려웠지만 좋았고 되풀이 읽고 싶었어요.
물욕이 배제된다기 보다 문화적 자극과 물욕은 자연스럽게 물려 있어서 정당화하고 포함한다고 해야할 것 같아요. 이 시리즈 비롯 리플리의 탄생인 [재능 있는 리플리]로 만든 작품에서 세련된 문화는 '돈'과 절대적 관계입니다. 리플리에게 (고급문화에 대한)'축적된 성향체계'가 있을리 없으니 일단은 돈으로...
잘 읽었습니다. 원작소설을 정말 읽어보고 싶은데 말씀하신 그 번역 문제가 마음에 걸려서 쉽게 시작을 못하겠네요..
책을 그대로 영상으로 옮기는 작업이 아닌 바에는 주인공의 나이가 문제가 될 것 같진 않은게, 님 말씀처럼 다른 시각으로 이 스토리를 구성할 수 있으니까요.
인어공주도 흑인 배우가 연기하고 다양한 작품의 해석이 난무하는 시대에 '왜 나이든 배우가?' '왜 2024년에 흑백으로?'와 같은 푸념으로 작품을 평가절하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뭐 원작소설에 대한 애정때문에 투덜거릴 수는 있겠지만요. 같은 의미로, 전 프레디 배우도 매우 신선했습니다.
이탈리아가 배경으로 좋았던 점 중 하나는, 너무나 다양하고 많은 조각, 동상, 그림들이 지천에 널려서 마치 이들이 톰 리플리의 범행을 지켜보는 듯한 효과는 준다는 점이에요. 한 컷 한 컷 구도와 효과를 정말 세심하게 고려했구나...감탄했습니다. 지금이야 관광객들이 넘쳐서 단순히 테마파크 같이 느껴지는 곳이지만, 60년대 이탈리아를 방문한 미국인이라면 톰 리플리나 디키와 같이 어떤 식으로든 문화적 충격을 받았겠다...싶더라고요.
원작 소설에는 카라바조에 대한 언급이 있나요? 마지의 글을 읽고 답답해하며 북북 수정하던 그 예술적 기질을 제가 잠시 잊었었네요. 전 그냥 마지가 싫은 감정을 표현한 줄 알았는데 님의 해석이 맞겠습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