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혼진과 "쪽바리"

2019.12.20 21:46

Sonny 조회 수:1230

워킹 홀리데이는 제가 아주 유의미한 경험이었습니다. 누가 워킹 홀리데이를 간다고 하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말리고 싶지만, 해외에서 1년이 넘게 체류하는 경험은 여행으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감각의 교실이기도 했습니다. 낯설었던 풍경이 익숙해지고, 매일 보는 주변의 외국인들이 스쳐지나가는 한국인보다 가까워집니다. 특히나 백팩커스에서 일을 하며 머물렀던 시간 동안 저는 그곳에 장기체류하는 외국인들과 일종의 이웃이 되어 매일 안부를 묻고 농담을 주고 받으며 떄로는 부탁을 들어주기도 하고 깊은 이야기를 듣기도 했습니다. 특히나 한국적인 무엇에 위화감을 느끼던 저는 되려 피부가 희거나 검은 사람들에게서 동질감을 더 느끼며 제가 이상한 인간은 아니라는 안도감을 얻기도 했습니다.


영어가 유창하지 않았던 저는 상대적으로 아시아권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게 편했습니다. 자국어의 발음이 섞여있는 영어를 들을 때면 완벽해야된다는 강박이 좀 덜어지기도 했구요. 제 얕은 경험으로 일반화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라지만, 그래도 제가 얻은 결론은 한국사람들은 다른 나라 영어를 비웃을 처지가 안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제가 머물렀을 때는 그렇게 한류란 단어의 위상이 높진 않았지만, 하필 싸이가 대박을 터트렸던 해이기도 해서 코리안이라고 하면 어떤 활발한 친구들은 말춤부터 추기도 했습니다. 저는 제가 아는 중화권 연예인 홍콩 연예인 일본 연예인등을 다 꺼내놓았고 아주 가끔은 정치적인 질문도 던지곤 했습니다. 한번은 중국사람들과 훠궈를 먹으면서 마오쩌둥 이야기를 했다가 훠궈보다 더 팔팔 끓는 논쟁의 장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좀 미련했죠. 그냥 하던 대로 삼국지 이야기나 계속 할 것을.


아시안들에게는 의외로 만화책 이야기가 잘 통하곤 했습니다. 특히 일본 사람들과는. 우리나라에선 음란물을 지칭하는 표현이 되었지만, 아무튼 원어 그대로의 발음인 manga를 이야기하면 일본인들은 헤에~ 하면서 뭘 좋아하냐고 묻곤 했습니다. 처음에는 좀 신나서 제가 아는 모든 일본 만화를 다 늘어놓았지만 그건 일본 문화라기보다는 덕후의 영역이었기에 일본인들의 묘한 인정을 받곤 했습니다. You are really a OTAKU... Sugoi!! 그래서 나중엔 일본에서 가장 대중적이었던 만화 삼대장 원피스, 나루토, 블리치로 주제를 한정시켰습니다. (드래곤볼은 좀 오래된 교전 같은 느낌이어서 대화의 흥미가 막 커지진 않더군요) 일본 사람들도 블리치는 별로 쳐주질 않는 분위기였고 결국 원피스와 나루토의 대결로 가곤 했는데, 사실 나루토를 더 좋아한다는 일본인은 한 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나루토도 재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역시 지존은 원피스랄까~ 원피스를 더 좋아한다는 일본인들은 정말 짠 듯이 에이스가 죽던 장면의 감동을 저한테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제가 볼 때 원피스는 눈물을 쥐어짜내는 방식이 너무 유아틱해서 전 공감하진 않았지만요. 그러다보면 논쟁이 좀 이상하게 흘러가곤 했는데 제가 일본인들한테 닌자가 얼마나 멋있는지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카톡 프로필을 아기 사진으로 바꾼지 한참 된 유키코상은 특히 원피스 대 나루토 논쟁을 심도있게 나누었던 일본친구입니다. 당시 일자리를 찾으며 장기투숙을 하던 gh의 어학원 동기였던 그는 일부러 그 백팩커스에 와서 같이 술을 먹고 첫날부터 아주 즐겁게 놀았죠. 왜 제가 원피스가 재미없는지 심하게 설명하고 있으면 제 허벅지를 치면서 쏘니상... 오타꾸!! 오타꾸!! 하면서 저를 웃겼습니다. 그는 아주 쾌활하고 명랑해서 본다이 비치였나, 어느 해변에 가서 서로 말도 안되는 폼을 잡고 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그는 GH가 가슴이 파인 옷을 입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거 노출이 너무 과하다는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too much~ too much~ 하고 손으로 가슴을 만드는 제스쳐를 취해서 저희가 다 기겁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인싸였던 것 같습니다. 그에겐 한국인 남자친구가 있었고 가끔씩은 나 이거 시러! 조하! 하며 불쑥 한국어로 치고 들어오곤 했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일본 사람들을 보고 어울릴 기회가 있었습니다. 쌍커풀이 굉장히 이쁜 남자가 있었는데 그는 제게 이거 웃기다면서 일본 코메디를 추천해주곤 했습니다. 무슨 개그맨이 얼룩말 전신탈을 쓰고 사자 주변을 배회한다든가, 스키장 탈의실서 다 벗고 안마의자같은 데에 앉아있다가 갑자기 의자가 밖으로 발사해버린다든가는 영상들이었습니다. 저는 웃다가도 난감한 얼굴로 너희일본인들 너무 심하다, 왜 이렇게 막가냐, 라고 하면 그는 더 낄낄대면서 좋아하곤 했습니다. 그는 저를 질리게 만드는게  또 다른 재미였던 것 같습다. 11월 11일에는 일본인 커플에게 빼빼로를 준 적도 있습니다. 이게 뭐냐고 묻자 이건 한국 버젼 포키다, 오늘은 달력에서 포키가 네개가 서있는 날이라고 하니까 즐거워하더군요.  


이런 소소한 경험들과 기억속에 박제된 미소 같은 것들이 대상을 실존하는 인간으로 인식하게 만듭니다. 저는 원래도 쓰지 않았지만 그 이후로도 일본인 비하 표현을 한번도 쓴 적이 없습니다. 잠깐이나마 친구가 될 수 있었던 시간 덕이겠죠. 또 한국 어딘가에서 일본인과 가까워질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소망이 제가 일본인 비하표현을 자제시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고보니 제가 쉰 소리좀 그만하라며 우르사이! 란 단어를 알려준 스미카 상도 기억나네요. 농장에서 토마토를 따며 츠카레따... 란 단어를 온몸으로 암기시킨 친구도 떠오릅니다. 단어 하나하나에 사람이 새겨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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