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짓기는 넘넘 힘들어~

2019.12.18 06:09

어디로갈까 조회 수:725

1. 제 삶에 끼워 넣지 않고자 결연히 외면했던 창작의 고통을 겪은 지  2 년 정도됩니다.  
언니가 런더너 아들이 완전한 영국'놈'으로 자라는 건 막아야 한다며 엽편동화든, 아포리즘이든, 최소 일주일에 한번ㅡ 한글로 짧은 글을 써서 조카에게 읽힐 것을 부탁했어요. 원고료 한푼 지불하지 않으면서 웬 주문은 그리 까다로운지,  '귀여운 모험이 있되 잔인한 장면은 없는, 정확한 한글 문장으로 아이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글' 을 요구했습니다.
평등하고 슬픔 없는 사회를 바라는 형부는 공주나 왕자, 계모 같은 비현실적이고 교활한 인물은 등장시키지 말기를 부탁했고요. 거기에 더하길, 아무래도 한글을 접하는 게 부모뿐이라 아이의 어휘력이 한정돼 있으니 의성어나 의태어를 많이 사용하고,  교훈이라는 소금은 뿌리지 말아달라고 주문했습니다. 

그리하여 여섯살에 록밴드를 결성할 정도로 체제 저항적인 마인드를 가진 아이에게 '햇빛이 쨍쨍한 어느 날이었어요. 무당벌레는 더위를 견디며...'라거나, '바람이 휘잉휘잉 우는 밤이 왔어요. 굴뚝새는 무서움을 무릅쓰고...'로 시작되는 신비로운 생명체들의 정처없는 모험 이야기를 써서 보내는 민망한 1인 맞춤형 동화작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게 끝이 아니고, 제가 감지한 바로는 조카가 개인적으로 끔찍해 하는 단어들이 있으므로 (예: 피' '가시' '도깨비' '여우') 조심히 피해가야 하고, 그러면서 극적효과를 위해 여러 장치를 집어 넣느라 아이디어를 쥐어짜야 합니다. 
얼마나 까다롭고 어려운 작업인지 A4 용지 한 장 분량을 쓰고 나면 머리에 쥐가 나고 입 안에 모래가 깔리는 느낌이에요.
조카의 뇌세포는 조금이라도 활성화되고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제 뇌세포는 창작의 긴장을 견디지 못하고 조금씩 소멸 되어가고 있을 게 틀림없습니다. 
 
아이와 이 방식의 소통을 하면서 제가 절감하는 것은 언어의 한계성이에요. 모든 사물/감정/생각의 개념과 구체성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구나 하는 막막함/아득함을 느낍니다.  언어 자체의 유한성은그렇다치더라도 한글에 대한 저의 부족함을 인식하게 되니까 더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줄거리를 매끄럽게 이어가느라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단어나 표현을 사용하면, 말과 내용 사이의 거리를 어쩌지 못해  정신이 허공의 한  점을 바라보며 정지해버릴 때의 어둑함이란. 
( 상상력과 감수성의 빈곤으로  <어린왕자>에다 <정글북>을 접목시킨 이야기를 자주 엮었음을 고백합니다.  -_-)

언어 -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다리. 
저도 어린시절을 한국 밖에서 보낸 터라,  언어의 다리가 불안정하게 흔들려서 누구에게 건너가기도 망설여지고 누가 나에게 다가오는 것도 두려운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다리를 건너며 얼마나 많은 진실이, 마음이, 정서가, 가치가, 변형과 변질을 겪으며 오해라는 이해에 도달하고 마는지 체험한 사람이죠.  그래서 조카에겐 튼튼하고 정교하고 넓은 다리를 갖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조카가 제 고유의 모습과 향기를 손상받지 않고 지나다닐 수 있는 다리. 온 세계가 들어서도 끄덕도 하지 않을 그런 다리가 서는데 일조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진 초라한 연장으로 어느 만큼의 기초공사를 해줄 수 있을런지...

2.  오늘 황급히 급조해 보낸 이야기.

- 어느날, 동물나라에서 누가누가 더 노래를 잘하는가 하는 '자랑잔치'를 벌였어요. 
가장 솜씨가 좋은 건 뻐꾸기와 나이팅게일인데 늘 경쟁이 치열한 사이이죠.
객관적인 판단을 위해 심판을 세우는데, 이번에는 당나귀로 정해졌어요. 
두 개의 커다란 귀를 갖고 있어서 더 잘 들을 수 있고 그래서 뭐가 좋은지 잘 아는 이라고 뻐꾸기가 제안했기 때문이죠. 나이팅게일도 동의했고요.

두 동물의 노래 대결이 끝난 뒤 당나귀는 이렇게 말했어요.
판단을 내려 줄게, 모두에게 솔직히 말해주겠어. 
나이팅게일, 너는 잘 불렀어! 그리고 뻐꾸기, 너는 찬송가를 잘 불렀어! 박자도 잘 지켰고!

나의 높은 지성에 따라 판단한 거야.
혹시 동물나라 전체가 반대한다 할지라도, 나는 뻐꾸기를 승자로 정했어, 그가 이긴거야.

네, 승자는 뻐꾸기였어요. 그래서 수상식에서는  "뻐꾹 뻐꾹" 소리와 "아아"라는 당나귀 소리가 겹쳐졌어요. 
관객들은 곰곰 생각에 잠겼습니다. 
어리석음의 상징인 당나귀가 큰 귀가 두 개라는 이유만으로 심판을 잘 볼 거라고 판단한 주최 측이 이해되지 않았고 또 당나귀가 '높은 지성'을 갖고 있다고 스스로 평가한다는 점 때문이에요. 

그러나 동물들은 당나귀를 심판한 게 아니에요.  당나귀의 평가에 웃기는 했지만 비웃음은 아니었어요. 
누구도 다른 동물보다 우월하지도 무가치하지도 않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노래자랑도 동물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놀이 중 하나라는 걸 모두 알고 있었답니다.

덧: 자수합니다. 동물나라 노래자랑 이야기는 독일 동요 중 하나예요. 아이에게 일요일에 보냈어야 했는데, 스케줄이 많아서 시간도 없었고 자원도 고갈된 터라 슬쩍 도용했....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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