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잡담...(창작법)

2019.12.15 23:13

안유미 조회 수:490


 1.가끔 사람들이 물어보곤 해요. 이야기를 만들 때 정말 처음부터 모든 걸 정하고 시작하냐고요. 하긴 몇백에서 천단위로 연재가 진행되면 일주일에 2번씩 연재한다고 해도 10년 이상이 걸리니까요. 그들 눈에는 몇 년 전부터 언급되거나 암시되던 것이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거나, 숨어 있다가 주인공들 뒤에서 뿅하고 나타나면 놀랍겠죠. 아니면 마술사의 트릭처럼, 몇년동안 독자들의 눈앞에 대놓고 보여줬는데 '쨔잔~'하기 직전까지 독자들이 눈치 못채던 것이 나오면요.


 그러면 독자들은 매우 놀라면서 '아니 저걸 몇년동안 준비해왔단 말이야? 쩌는데!' '아니 저걸 눈앞에서 놓쳤단 말이야? 쩌는데!'라고 여기게 돼요. 왜냐면 사람들은 자신이 잘 못하는 걸 이해하지 못하거든요. 춤을 많이 춰본 사람이 안무를 한번에 따는 걸 보면 신기해하고, 술집 여자가 원할 때마다 토할 수 있는 걸 신기해하고 머릿속에서 수십만단위 계산을 해내는 걸 신기해하죠.



 2.처음부터 모든 걸 정하고 시작하냐는 질문에 답하면 답은 '그렇다'예요. 하지만 이야기라는 게 그렇게 되지가 않거든요. 원래 정했던 레일을 그대로 따라가는 게 목표가 아니라 읽는 사람에게 놀라움을 전달하기 위해 있는 거니까요. '원래 계획을 따라가는가' 와 '재미가 있는가'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당연히 후자죠.



 3.전에 썼듯이 이야기를 만드는 건 여러 가지 미래들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예요. 


 예를 들어서 몇 년 동안 주역이던 캐릭터를 죽일 때가 그렇죠. 사람들은 그런 캐릭터의 죽음이 오래 전부터 결정되어 있을 거라고, 꽉 짜여진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아니거든요. 몇 년 동안 활약하던 캐릭터가 예측 불가능한 순간에 죽는다면, 그 캐릭터의 죽음은 한 몇주 전에 결정된 것일 가능성도 있어요. 왜냐면 재미 때문이죠. 이야기의 완성도보다, '이 녀석이 지금 죽으면 재밌겠네.'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냥 죽여버리는 거예요.



 4.휴.



 5.그래서 사람들이, 이야기에서 캐릭터의 죽음에 놀라는 건 당연해요. 이제 슬슬 죽을 것 같던 캐릭터가 죽으면 '이럴 줄 알았어'라는 시큰둥한 반응이 나오겠죠. 하지만 갑자기 뜬금없이 죽으면 보는 사람들은 '아니 뭐야, 이렇게 갑자기 죽는단 말이야?'라고 호들갑떠는 게 당연하단 말이예요. 


 왜냐면 이놈이 죽을지 어떨지 나도 몰랐으니까요. 만드는 사람도 그 캐릭터가 그렇게 죽을 줄 몰랐는데 보는 사람들은 더더욱 모르는 게 당연하죠.



 6.그리고 가끔 이런 경우도 있죠. 엄청난 덕후 독자들이 이야기를 보면서 엄청난 공을 들여 분석하는 경우요. 심지어는 그게 도를 넘어서, 작가 입장에선 생각조차 못해본 영역까지 발전하기도 해요. 완전히 산으로 가는 거죠. 그런데 똑똑한 덕후들이 그런 분석을 해낸 걸 보면 말도 안 되는 비약이 아니라 수긍이 되는 것들이 많죠.


 그런 걸 두고 '꿈보다 해몽이 더 좋아.'라는 속담이 있는 거예요. 이야기보다 해몽이 좋은 경우 말이죠. 그런 분석들은 이야기꾼이나 영화 감독을 미소짓게도 하지만 난처하게 만들기도 해요. '아니 아무 생각 없이 만든 장면인데 뭐 그렇게까지 파고드는 거야. 맨틀까지 삽질할 셈인가.'라는 느낌이 드니까요.



 7.한데 사실, 자신의 꿈을 해몽하기로 작정하면 가장 말도 안 되게 해몽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예요. 평소에는 안하니까 안하는 거지 하려고 들면 산이 아니라 우주까지 날아갈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이야기가 재미없어질 때는 스스로가 스스로의 이야기를 해몽해 보는 것도 좋아요. 자신이 그린 만화나 쓴 소설을 가만히 읽다보면, 해몽할 거리가 하나씩 나오는 경우가 있거든요. 


 

 8.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이야기의 모든 캐릭터와 모든 장면을 다시 훑어보다 보면 다른 가능성이 보이기도 하거든요. '어 이녀석, 지금 보니까 주인공의 눈에만 보이는 유령이었던 걸로 해도 되겠네.'라거나 '어 이녀석, 지금 보니까 연쇄살인범이었던걸 해도 되겠네.'라거나 '어 이녀석, 지금 보니까 끝판왕 시켜줘도 되겠네.'같은 거 말이죠.


 사실 그런 분석은 독자들이 주로 하는 거예요. 'XX는 사실 주인공이 보는 환상이 아닐까? 주인공 말고는 다른 사람이랑 이야기하는 장면이 없어.'라거나 'XX는 독백하는 장면이 하나도 안 나와. 마을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들 중 반은 이놈이 한 거야.'라거나 'XX는 사실 최종보스인듯.'같은 말도 안되는 분석들 말이죠.


 하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가만히 뜯어보다 보면 분명 그런 씨앗들이 뿌려져 있곤 하단 말이죠. 나조차도 모르는 사이에 말이죠. 그런 가능성을 발견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모든 장면을 분석해보고, 앞뒤가 안 맞는 장면이 하나도 없으면 그냥 질러버리는 거죠. 몇년 동안 '그런 놈이 아닌 것 같았던 놈'을 '그런 놈'으로 탈바꿈시키는 거예요. 사실은 주인공의 눈에만 보이는 유령이었다던가, 최종보스였다던가...하는 식으로요.





 9.물론 위에 쓴 것들은 늘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어쩌다예요. 5년에 한번 할까말까죠. 이야기란 건 건축물과 같아서, 기본적으로는 지반 분석을 하고 기초공사를 하고 뼈대를 올리고 하나하나 쌓아가는 거니까요. 이야기 전체가 무너지지 않는 선에서 개조나 리모델링을 하는 거죠. 아이러니한 점은 느닷없이 강행하는 리모델링이나 추가 공사의 충격에 버티려면, 사실 원래 이야기가 단단해야 한다는 거예요. 원래의 건축물이 단단하지 않은 상태에서 말도 안 되는 공사를 더해버리면 건물 전체가 무너지거든요.


 그래요...아이러니한 거죠. 말도 안 되는 짓을 한번 하려면 기본바탕이 튼튼해야 한다는 점 말이죠. 하긴 야구도 그렇잖아요? 무시무시한 직구와 변화구를 시즌 내내 뿌려대던 투수가 딱한번 정신나간 아리랑볼을 던지면 타자가 반응하지 못하는...무서운 마구가 되는 것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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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간신히 주말을 거의 다 없앴네요. 지겹지만 괜찮아요. 이제 일요일도 끝났고 월요일이 또 왔으니까요. 진짜...뭐 그래요. 할일이 없거든요. 할일이 없기 때문에 열심히 사는 것밖에 할일이 없어요.


 하지만 이제는 열심히 산다는 개념이 근면하거나 성실하다는 뜻이 아니예요. 자신이 있는 레일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말고는 할 게 없거든요. 오른쪽...왼쪽...위...아래...어디로도 움직일 자유가 없이 그냥 앞방향으로 나아가는 노력만 할 수 있어요. 예전에는 노력이라는 것이 다소 불분명한 대신 인생에 입체적인 영향력을 끼쳤거든요. 이제는 노력이라는 것이 나비효과가 아니라, 결과를 다 알고 하는 것들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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