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02 18:44
지인들과 서울 퀴어퍼레이드를 갔습니다. 제작년에 비를 흠뻑 맞은 지인과 간만에 재회해서 다시 퀴퍼를 가니 좀 반갑더군요. 햇볕이 뜨겁긴 했는데 중간중간 바람도 불고 그래도 좀 걸을 만한 날씨여서 안도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지하철역 출구부터 개신교 혐오세력들이 죽치고 있어야하는데 그게 안보이더군요. 조금 더 산뜻하게 퀴어축제 장소로 향했습니다.
특별히 퀴어퍼레이드를 위한 꼬까신을 신고 갔습니다. 출시된지 한 2년 넘으니까 반값이 되어있어서 마침내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추천은 못합니다. 컨버스 신발은 오래 걷는데 적합하지 않습니다....
이제 퀴퍼도 익숙해져서 각 마켓들을 돌아다니는 것에 큰 감흥은 없었습니다. 저희 집에 뱃지만 몇십개가 있거든요. 빨리 퀴어퍼레이드가 정식으로 허가를 받아서 먹거리나 다른 것들을 좀 더 다양하게 팔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장소도 좀 아쉬웠던 게... 서울광장에서 하면 그래도 넓고 둥근 공간에 무대가 한 쪽에 있고 그곳에서의 발언이나 공연소리가 쇼핑(?)을 하는 와중에도 다 들립니다. 그런데 이곳 을지로는 각종 마켓들이 무대를 기점으로 직선으로 쭉 나열되어있어서 마켓들을 보러 끝까지 가면 무대랑 멀어지면서 소리도 못드고 보지도 못하게 됩니다. 구조적으로 무대공연이 방문객 모두에게 고루 전달될 수가 없습니다. 이 공간복원부터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되겠더군요. 무대 앞에 돗자리 깔고 놀거나 여러 사람들이 한꺼번에 탁 보이는 그런 정경도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정말 제한적인 장소에서 힘겹게 열린 행사라서 좀 속상하기도 했습니다.
적당히 둘러보고 근처 까페에서 쉬다가 퍼레이드 시작 시간 즈음에 출구 쪽으로 나와서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너무 붐벼서 짜부되는줄 알았습니다. 내년에 갈 때는 아예 트럭 행렬 행진 방향 앞쪽에 기다리고 있다가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너무 무의미하게 불편한 시간을 대기하는 건 좀 그렇더라구요.
일단 빠져나갔다가 작년에 인상깊었던 레즈히어로즈 트럭 대열에 맞춰서 들어갔습니다. 하입보이를 틀어주는 걸 살짝 놓쳐서 아쉬웠습니다.
케이팝에 맞춰서 트럭 위의 사람들이 춤을 추고, 그걸 또 콘서트처럼 다들 즐겼습니다. 춤 정말 잘 추더라고요. 중간중간 트럭이 좀 빨리 가서 소독차 따라가는 아이들처럼 갑자기 노래를 부르며 와아아 쫓아가는 일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재미있었습니다.
케이팝이 이렇게 저항과 연대의 수단이 된다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단순한 문화상품이 왜 이렇게까지 저항의 장에 모두를 뭉치게 하는 효과를 나타내는 것일까. 퀴어들의 정체성을 알리는 가장 큰 저항의 행사에서, 한편으로는 저항과 가장 거리가 먼 케이팝이란 상품이 퀴어퍼레이드의 마이너리티를 희석시킨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이 이상하게 보는 그런 사람일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한국사회에서 가장 잘 팔리고 모두가 좋아하는 케이팝을 똑같이 좋아하고 즐기는 그런 사람들이다, 우리는 당신들에게 항의하거나 싸우자는 게 아니다, 우리와 함께 어울려 놀자, 이런 의미처럼 들렸달까요.
퀴퍼를 통해 케이팝 걸그룹이나 노래를 향한 지지율(?)을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여자아이들의 퀸카가 나올 때 모두가 환호하던 그 분위기를 잊을 수가 없네요. 그 뒤의 곡들이 그에 못미치지만 이미 전소연씨는 이 곡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케이팝 종사자로서 한 점을 찍었다고 생각합니다. 열광하는 그룹들은 지금 제일 잘 나가는 그룹들이었습니다. 뉴진스, 에스파가 제일 호응이 뜨거웠습니다. 나온지 얼마 안됐는데 에스파의 슈퍼노바는 저분들이 또 어떻게 안무를 따서 칼군무를 췄는지...
그리고 뉴진스 팬이라서 제가 그런 걸 수도 있겠습니다만, 뉴진스 노래가 나올 댸마다 심상치 않은 반응을 느꼈습니다. 어쩌다보니 민희진이 투쟁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뉴진스를 단순히 노래 좋고 춤도 좋은 잘나가는 그룹이 아니라 '우리가 더 열심히 좋아해줘야하는 그룹'으로서 사람들이 환호하는 게 느껴졌달까요. 특히 디토가 나올 때 그런 분위기를 많이 느꼈습니다.
아주아주 우연이겠지만, 르세리팜과 아일릿의 노래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ㅎㅎㅎ
올해 개신교 혐오세력이 정말 줄었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예전에는 사방팔방에서 계속 시끄러운 방송을 틀고 소음공해를 일으켰는데, 이제는 그런 게 거의 없더군요. 중간에 있긴 했는데, 이제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몇년전만 해도 그 소음을 이겨내려고 이야아아아아 하고 에너지를 결집시키는 그런 게 있었는데요. 이젠 그냥 그대로 혐오구호를 따라서 불렀습니다. 동성애는! 죄악이다! 동성애는! 죄악이다! 하면서 그냥 덩실덩실 웃으면서 갔습니다. 개신교도 아저씨 아주머니분들이 약간 김빠져 하시더라구요.
15만명이 방문했다고 하던데, 이제 오세훈은 쓸데없는 고집을 그만 부리고 광장을 시민들에게 돌려줬으면 좋겠습니다.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면서 고집피우는 것도 진짜 멍청해보여요. 이게 틀어막는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걸 제발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https://twitter.com/plz_mudkarain/status/1796858963860115558
현장 분위기를 담은 트윗입니다. 영상으로는 이상하게 태그가 안먹네요.
2024.06.02 22:21
2024.06.02 23:17
어쩌다 제 (신)발인증을 했네요 ㅎㅎ
진퀴퍼를 간 지 별로 안된 것 같은데 벌써 1년이 됐네요. 그 새에 퀴퍼는 어떤 분들에게는 이미 익숙한 문화로 자리잡은 것 같습니다.
2024.06.02 23:18
요새 독서후기는 안올라오는군요! 바쁘신지요
2024.06.03 09:22
소소하게 바쁘기도 하지만 제가 언급하기 어려운 책을 만나기도 하고 흥이 안 나기도 했으나 그래도 죽을 쑤든 태우든 써 봐야 조금이라도 정리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 노력하고 싶네요. Sonny 님의 관심이 가는 것을 깊이 생각하고 정리하시는 글을 보면은 항상 인상 깊습니다!
2024.06.03 11:49
감사합니다. thoma 님 글 보면서 늘 독서에 대한 잊혀진 도전정신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2024.06.03 19:59
신발 너무 예뻐요!
광장이 아니다보니 쉴 곳이 마땅치 않은 점과 무대공연을 보기 어려워진 점은 정말 아쉬웠어요 ㅜ 작년엔 아스팔트 바닥 위가 너무 더워서 탈진하는 분도 계셨던걸로 기억하구요
다만 근처에 혐오세력이 자리잡을 곳이 마땅치 않았는지 부스를 도는 동안은 혐오세력의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아서 전 그 부분은 다행이다 싶었어요 ㅎㅎㅎ 물론 행진루트를 따라 점점이 자리잡고 열심히 확성기로 구호를 외치고 계시긴 하셨습니다만...
혐오세력 문구 따라 외치기 정말 재밌지 않나요 특히 죄인이여 회개하라! 같은 구호는 받은 그대로 돌려주는 느낌도 나서 웃겼습니다 ㅋㅋㅋ
예수가 현시대에 나타난다면 과연 어느 편에 설지는 너무 자명한 것 같기에...
2024.06.03 21:00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핳 죄인이여 회개하라 이거 웃기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외칠 때 그 생각까지는 못했는데 ㅋㅋㅋㅋ
신발 칭찬 감사합니다
2024.06.03 20:59
퀴어지만 k팝은 불매에 가까운 저 같은 사람은 그래서 퀴퍼가 좋으면서도 힘들어요 아는 노래도 없고 노래를 따라 부르고 싶지도 않고... 이번 퀴퍼 1번 차는 이랑님이 dj 한다 그래서 좀 기대했는데 결국은 k팝으로 가더라고요(대신 좀 옛날 곡들을 선곡하긴 했지만) 퀴어도 결국은 대중의 일부니까 대중적 선곡이 인지도도 높고 인기도 많고 사람들의 참여를 불러오기도 좋다는 점은 이해하지만 이번 퀴퍼는 늘 말이 나오던 길리어드에 팔레스타인 학살의 배후로 지목되는 미대사관의 핑크워싱 문제까지 겹쳐지면서 너무 소비적으로 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길리어드는 하필 기업 이름도 길리어드여서(feat 시녀이야기) 더 웃기고
이제 40대 이상 퀴어들을 위한 퀴어문화축제로 퀴어피크닉 같은 거나 해주면 좋겠는데 역시 그러려면 광장을 되찾아야겠지요
2024.06.03 21:05
해삼너구리님의 지적에 동의합니다. 저도 한편으로는 케이팝을 메이저리티의 문화로서 끌어들인다는 게 결국 그 안에 편입되려하는 승인 욕구와도 결부된 게 아닌가 싶었어요. 저도 3번차 따라가는데 옆에서 이거 누구야? 이게 그 노래야? 하면서 어리버리타던 게 웃겼어요 저도 몇번 그러기도 했고...
예전에 일본 퀴퍼 팀이 트럭 운행하던 게 좀 좋았던 기억이 있어요. 그 때는 케이팝을 열심히 안들어서 (뉴진스 도래 이전) 그 트럭을 따라갔는데 클래식한 팝들도 틀어주고 마돈나의 보그나 퀴어한 감성 낭낭한 음악들도 틀어주고 그래서 좋았거든요. 장르적 다양성을 꾀하면서 퀸같은 밴드의 락이나 아예 락만 지기지장장 틀어주는 트럭 있으면 좋겠더군요.
퀴어피크닉 좋네요 ㅋㅋ
오, 저 발이 Sonny 님의 발인가요? ㅎㅎ
작년에 퀴어퍼레이드 다녀 오셨다는 후기를 읽은 것이 얼마 전인 것 같은데 벌써 일 년이군요. 듀게를 들락거리다 보니 이런 식으로 시간의 빠름을 느끼게도 되네요. 즐기신 거 같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