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17 23:06
- 늘 그렇듯 스포일러는 없구요.
- 간단히 말해서 남자 하나 때문에 여자 넷의 인생이 꼬이는 얘깁니다. 엄밀히 말해 남자 한 놈이 더 있긴 한데 그 분은 비중이 희박하니 패스하구요.
한 줄로 요약하면 '염정아랑 결혼해서 고딩 딸 하나 키우던 김윤석이 오리집 사장이랑 바람 피워서 임신까지 시켰는데 그 사장 딸이 김윤석 딸이랑 같은 학교 동급생이래요' 라고 할 수 있겠네요.
- 김윤석이 회사 회식 자리를 오리집으로 잡아서 자기 애인 수입 챙겨주는 현장을 김윤석 딸이 숨어서 훔쳐보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근데 이 장면이 좀 인상적이었어요. 아무래도 배우로 유명했지 감독으로는 초짜인 김윤석의 저예산 영화인지라 좀 현실적으로 칙칙한 톤의 비주얼을 보여줄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따뜻한 색감에 빛과 그림자를 부드럽고 풍성한 느낌으로 잡아내서 '예쁜' 느낌이 들었거든요.
생각해보면 그게 이 영화의 전체적인 톤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습니다. 영화 내용이 그래요. 답답하고 짜증나는 상황이고 끝까지 크게 행복한 일은 벌어지지 않지만 주인공들(여자 넷이요)은 안 그런 척하면서 사실은 다 대견하고 괜찮은 사람들이고, 현실적인 척하면서도 은근 비현실적으로 '좋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래서 영화가 (소재로 삼은 그 험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참 곱고 예뻐요. 이게 제가 느낀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이네요.
- 그리고 사실은 그 여자 넷들도 별로 안 현실적이게 예쁜 외모를 갖고 있... (쿨럭;)
- 애초에 연극용으로 쓰여진 각본을 고쳐서 영화화한거라는데, 그래서 보면 여러모로 연극 느낌이 많이 납니다. '등장 인물 수가 적고 배경이 몇 군데로 한정된다' 는 건 물론이고 뭐랄까... 뭐라 콕 찝어서 설명을 못 하겠는데 중간중간 벌어지는 사건들이나 캐릭터들의 성격, 대사들 같은 게 영화보단 연극 쪽 느낌이 강하게 들어요. 그런데 그래서 더욱 김윤석의 첫 연출이 기대보다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었네요. 애초에 원작이 희곡이었다면 화면 연출도 연극적 느낌으로 하면 손쉬웠을 텐데 그런 느낌이 드는 장면이 의외로 적어요. 뭐 되게 개성이 확고하다든가, 아주 신선한 느낌이 든다든가 하는 건 아니지만 되게 안정적인 '영화 연출'을 잘 해냈다는는 느낌이었습니다.
- 대충 정리하자면 제 소감은 이렇습니다.
의외로 말랑말랑한 정서의 코미디물입니다. 막판에 좀 센 사건이 나오기도 하고 해피해피한 결말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랑 뽀샤쉬한 정서의 힘이 강한 영화에요. 막 다크하고 시리어스하면서 리얼한 이야기는 기대하지 마시길.
공중파 주말 단막극스런 소박한 스케일의 이야기이고 전체적인 느낌도 그렇습니다. 참 욕심 없는 작품이고 보고 나서 대단한 감흥 같은 것도 없지만 기본적인 만듦새가 튼튼하고 배우들의 연기 질이 아주 높으며 유머들도 상당히 잘 먹히고 인물들의 심리도 자연스럽게 납득이 가도록 흘러서 다 보고 나면 흡족한 기분이 드는 수작입니다. 우주 명작 같은 거 기대하고 보지만 않으시면 대부분 만족하실 거에요.
- 초짜 남자 감독이 주연을 겸업하면서 여성 캐릭터 넷을 전방에 내세우는 작품을 찍은 것인데... 좀 신선한 느낌이었네요. 김윤석의 배우로서의 역량이야 의심할 바가 없었지만 감독으로서의 능력도 생각보다 출중하고, 뭣보다 태도가 맘에 들어요. 아무리 원작이 있다지만 그래도 본인이 맡아서 만들다보면 본인 캐릭터나 사고 방식 위주로 뜯어 고쳤을만도 한데 그랬을만한 부분이 안 보여서요. 김윤석의 아빠 캐릭터는 만악의 근원이긴 해도 분량을 많이 차지할 필요는 없는 인물이고 그래서 딱 그 정도 선에서 그쳐줍니다. 이런 이야기라면 아빠가 막판에 갑자기 툭 튀어 나와서 본인의 심정을 마구 토로하며 공감을 강요하고 본인의 민폐를 합리화하는 게 평균적인 한국 영화의 전개일 텐데 그런 거 전혀 없이 깔끔하게 본인 역할만 하거든요. 심지어 박찬욱 같은 사람도 '아가씨'의 마지막에 쓸 데 없고 재미도 없는 남자들 이야기를 길게 넣어두고 그랬는데 말이죠. 흠.
- 확인은 안 해봤지만 아마도 원작자는 여성일 듯 하죠. 여자 넷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등장하는 대사 있는 남자들 중 거의 대부분이 빌런입니다. ㅋㅋ 빌런이 아닌 대사 있는 남자 캐릭터는 딱 둘 정도 떠오르는데 그 중 한 분은 5초도 안 나오구요.
- 김윤석과 불륜 관계를 맺은 분의 딸 역할을 맡은 박세진이란 배우가 눈에 들어오더라구요. 그냥 솔직히 말해서 예뻐서요. (쿨럭;) 경력을 검색해봤더니 이 영화가 사실상 데뷔작인데, 부산국제외고란 데를 다니다가 엄마의 푸쉬로 수퍼모델 대회 나가서 우승하고, 이후로 모델 활동하다가 연극영화과에 들어가고, 그러다가 오디션을 뚫고 이 영화에 출연하고... 라는 나름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더라구요. 뭐가 됐든 앞으로 자주 보고 싶어지는 분이었습니다. 연기도 잘 했고 캐릭터랑 되게 잘 어울렸어요.
- 막판엔 사실 '아 이건 좀 너무 간듯요?' 라는 생각이 드는 장면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영화의 유머 스타일이 굉장히 제 취향이라서 그냥 재밌게 봤던 것 같아요. 김윤석이 병원에 찾아가는 장면 같은 건 정말 육성으로 깔깔깔거리면서 봤네요. 에스컬레이터씬 참 유치한데 왜 그리 웃기던지. ㅋㅋㅋㅋㅋ
2020.01.18 00:36
2020.01.18 10:01
아뇨 전 우유씬은 그러려니 했는데 그 전에 갑자기 둘이 아하하하핳~ 하고 어울리는 장면이 '너무 나갔네'라는 기분이었습니다. ㅋㅋ
주인공들의 행동들이 현실적이지 않은 장면들이 많긴 했어요. 그런데 그게 개그 코드랑 적절히 섞이고 또 배우들이 잘 해줘서 잘 덮이는 편이었죠.
2020.01.18 02:05
제 지인은 이 영화가 그렇게 좋다는데 막상 보니 그 평가만큼은 아닌 것 같다는 감상평을 전해주어 저도 기대치가 조금은 떨어졌고(만듦새가 준수한 영화 정도?) 배우가 연출했다는 데서 가산점을 얻은 것인가란 의혹도 없진 않지만, 화제의 김윤석 브라운관 데뷔작인 <있을 때 잘해>를 당시 실시간으로 봤던 사람으로서 비중은 크지 않다고 해도 그 드라마에서 유들유들 뻔뻔한 바람남 캐릭터를 연기하던 김윤석을 인상적으로 기억하기에 한 번쯤 영화를 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 군요.
그러고보니 아침드라마 플롯과도 유사하네요. 본처 딸이 급식실에서 김치싸대기를 날리며 이복형제를 괴롭히는데.....
2020.01.18 10:03
되게 진부하고 식상한 상황에서 인물들의 다른 반응과 그에 따른 다른 전개를 보여주는 게 핵심인 영화 같아요.
근데 그러다보니 종종 뭐랄까. 캐릭터들이 요즘 트렌드에 어울리게 매력적으로 행동하는 느낌? 그런 게 있어서 살짝 아쉬웠네요.
그래도 전체적으로 잘 만든 영화에요. 배우 출신 감독 가산점 빼고 평가해봐도 전 괜찮았습니다. ㅋㅋ
2020.01.18 03:33
2020.01.18 10:09
아 듀나님 리뷰를 올라온 당시에 읽었는데 저 내용을 까먹고 있었네요. 설명해주셔서 감사.
김윤석의 린치 장면은 관객들을 위한 배려 같았어요. 김윤석이 아무런 벌도 안 받고 영화가 끝나 버리면 영 찝찝해할 사람들이 많을 테니까요. ㅋㅋ 여자 넷이 직접 단죄하는 장면 같은 걸 넣었으면 신났겠지만 그럼 너무 비현실적으로 보였겠죠. 재등장했을 때 염정아가 택시비 내주고 '됐고 병원이나 가자' 라는 건 좀 아쉽기도 했지만... 그게 영화 속 염정아 캐릭터다워서 그냥 뭐 납득했네요.
박세진 배우 인터뷰를 보니 염정아 찬양을 엄청하더라구요. 연기도 잘 하고 프로페셔널하고 사람도 멋지면서 친절하게 이끌어주셨다... 는데 정작 영화에서 둘이 대면하는 장면은 많지 않잖아요. 그래서 그거랑 별개로 많이 챙겨줬나보다 했네요.
2020.01.18 03:39
2020.01.18 10:20
2020.01.18 10:05
김소진 배우가 이런 캐릭터를 이렇게 매력적으로 소화하는구나 감탄했던 작품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가진 여배우들을 기능적으로 소비하는가 다시금 느낀 계기가 됐구요. 김윤석 감독도 이런 문제에 대해 답답함을 느껴서 더 이런 작품을 만들었다고 하던데 본인이 주로 연기해오던 캐릭터들 때문에 생각했던 선입견과 달라서 놀랐네요.
재밌는게 원작 연극에서 박세진 배우가 맡은 역할이 남학생인데 이걸 김윤석이 여자로 바꾸자고 했는데 원작자가 사실은 자기도 처음에 여학생으로 하려고했으나 당시 연극을 공연할 극단인가?에서 여학생을 연기할 두 명의 배우를 뽑기가 어려운 형편이라 어쩔 수 없이 남학생으로 바꾼거라고 하더라구요. 영화화하면서 드디어 원작자의 의도대로 만들어진 셈 ㅋㅋ
2020.01.18 10:48
김윤석이 아예 직접적으로 그런 의도를 언급했나보네요. 더더욱 놀랍습니다. ㅋㅋㅋ 물론 좋은 쪽으로요.
아들이 아니라 딸인 게 좋은 것 같아요. 아무래도 아들, 딸이면 둘 사이의 감정이 좀 애매해질 것 같아서요. 그래도 아들이 하나는 남아 있기도 하고(...)
2020.01.20 12:44
대부분 다 좋았지만, 저는 방파제 장면(과 습격 장면)에서 일종의 의도되지도 않은 지역(시골)혐오를 느껴서 확 깼습니다. 인과응보는 직접 실현하지 누구에게 맡기나 싶었어요.
그런데 저는 마지막 장면 이전에 진작 실망을 한 상태였어요. 인물들이 다들 너무 시크해서 맘에 들지 않더라구요. 특히 두 명의 고등학생은 어른들 다 찜쪄먹을 포스. 영화 장면을 티비로 이미 너무 봐버린 후 감상해서 김이 샜나 싶기도 하지만...아무래도 대사가 작위적이란 생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