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06 18:53
특히나 <벌새>에서 은희가 잊을 수 없는 상처들이라면 가정폭력일 것이다. 언제가 시작이었는지 생각도 나지 않으나, 너무 많이 당해서 이제는 일상처럼 여겨지는 아버지 혹은 오빠의 폭력을 <벌새>의 은희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 때는 왜 그랬는지. 시간 지나면 아무도 대답하지 못할 과거가 잔인함이라는 형태로는 남아있다. 가정폭력이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 극단적으로 떠올리고 생사와 연관지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반복되는 뻔뻔한 폭력들은 분명히 열 네살의 시간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은희는 웃는 것보다 무겁고 재미없는 표정을 짓고 있을 때가 더 많은 아이다. 왜일까. 왜 어리고 걱정도 없을 아이가, 감히 세상의 고뇌를 짊어진듯한 표정을 하고 있을까. 학교는 재미없지만 집은 더 따분하고 때때로는 아파서 고역인 공간이다. 달리 갈 데도 낼 시간도 없는 이 존재에게 뻑하면 때리고 소리지르는 남자의 존재들이, 한 때의 해프닝이자 나중에 잊고 용서할 사건으로 지나쳐갈 수 있을까. 지숙은 오빠에게 맞아 터진 입을 마스크 밖으로 보여준다. 그런 지숙을 보며 은희는 이야기한다. 자살하고 유서 남기는 상상을 정말 많이 한다고. 하지만 오빠 새끼가 미안해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하루만 유령으로 남아서 다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떡볶이 아니면 남자 이야기만 하지 않았다. 은희와 지숙, 중학생 여자아이들은 손찌검에 아주 쉽게 흔들리는 우주를 지탱해가며 증오와 원한을 눈썹 사이에 담고 다녔다.
어리니까, 모든 게 처음이니까 그렇게나 명확했다. 노을의 불안과 서러움을 진즉에 깨달은 나이였다. 의사의 지나가는 경고에 생사를 걸어야했고 모든 걸 걸고 싸우는 사람들의 흔적을 담벼락에서 발견하며 걸어다녔다. 벌새는 어떻게 날아다니는가. 그 작고 파르르 떠는 날개짓은 비상하기 위함이 아니라 추락하지 않기 위함이라고들 받아들인다. 작고 어릴 수록, 일상으로 돌아와 "언젠가"를 꿈꾸기 위해 더 많은 날개짓을 한다. 아무리 모르고 하는 날개짓이어도 고되지 않을 리가 없고 쉴 때도 다음의 도약을 다시 준비해야 한다. 늘 느닷없이 찾아오는 끝이라는 분기점 앞에서 벌새는 다시 끊어진 선과 선 사이를 활강하며 자신의 삶을 이어간다. 열 네살의 은희는 몇번이고 끊기는 인연과 행복 속에서도 다시 한번 날개짓을 한다. 무너져버린 다리를 보며, 그는 결연한 얼굴을 지었다. 그게 이 영화가 가리키는 총체적인 과거의 모습이자 행복하지만은 않았던 시기를 견뎌낸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다. 노란색 베네통 가방을 메고 학교와 병원과 학원과 어느 건물 옥상을 날아다녔던, 은희의 그 얼굴.
벌새를 보는 경험은 아주 강렬했는데 영화 러닝타임이 길어서 더욱
제가 과거로 시간여행을 가서 주인공의 삶에 갇힌 느낌이 들었습니다.
약간의 폐소 공포증같은 느낌이었지만 아름답고 잘 만든 영화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