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에서 반성문 썼던 일

2022.12.21 20:17

Sonny 조회 수:643

한번은 취침시간에 막사 내 공중전화로 통화를 하다가 당직사관에게 걸렸습니다. 평소 깐깐하기로 유명한 그분은 그 즉시 행정반에 와서 반성문을 쓰라고 제게 지시했습니다. 앞이 막막하더군요. 당직사관에게 걸린 것도 문제지만, 이 일이 분대장 귀에 들어가서 찍히는 게 더 무서웠습니다. 어떻게든 이 일을 당직사관 선에서 마무리를 지어야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펜을 들었습니다. 긴장을 하니까 오히려 글이 일필휘지로 달려나갑니다. 친구한테 걸었던 전화를 부모님한테 했다고 각색했습니다. '그러면 안되는 줄 알면서도, 잠이 오지 않는 밤에 괜히 부모님의 안부가 궁금해서 이제 막 퇴근했을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저도 모르는 청년 한명이 반성문에서 갑자기 등장했습니다. 그는 국방의 의무 도중에도 효심을 이기지 못해 공중전화기로 몰래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당직사관은 눈살을 찌푸린 채 제 반성문을 읽더니 감동을 숨기지 못했습니다. "흠, 잘못은 했지만 진심으로 뉘우치는 게 느껴져.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

군대에서 반성문을 쓸 일이 또 생겼습니다. 상황실에서 대기하던 중에 너무 떠든다고 작전과 중위가 반성문을 쓰라고 지시했습니다. 반농반진이었지만 그는 반성문을 빨리 쓰라면서 저희를 살짝 갈궈댔습니다. 저와 같이 떠들던 무전병 후임은 애석하게도 글쓰기와 친하지 않았습니다. 상황실에서 노가리 까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대체 왜 오늘따라 유난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후임은 없는 글근육을 쥐어짜내고 있었습니다. 힐끗 보니 할 말이 없는 게 티가 팍팍 났습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결론부터 박아넣는 그의 우직함에 저는 실웃음을 지었습니다. 그에게는 미안했지만 전 대놓고 비교가 될 만한 글을 쓰기로 작정했습니다. 구르는 재주가 있는 굼벵이는 구르는 재주가 없는 굼벵이를 희생시키는 수 밖에요.

A4지에 근엄한 문장들을 뿌려넣기 시작했습니다. '몇년 몇월 몇일, 병장 000 본인은 상황실에서 대기 근무 중 잡담에 열중하여 본 목적인 상황실 대기와 긴급사태 시 타 부대에 명령을 전달하는 업무를 소홀히 하였습니다...' 진도를 못빼고 있던 무전병 후임은 질주하는 제 펜에 긴장했습니다. '주적인 북한을 근거리에서 마주하고 있는 이곳 전방에서, 본인의 태만으로 상황실의 엄중한 분위기를 해치고 본연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제 반성문에서 군악대가 금관악기를 불고 있었습니다. '군인으로서 근무를 가벼이 여기고 국방의 의무를 다 하지 못한 것이 저의 첫번째 실패입니다. 병장으로서 후임들에게 선례를 보이기는 커녕 해이한 자세를 전파하여 군의 기강을 어지럽힌 것이 저의 두번째 실패입니다. 이곳 상황실에서 군인으로서 긴장태세를 풀지 않는 작전과 중위님과 다른 간부님들의 본을 받지 못하고 부대 내 갈등을 유발한 것이 저의 세번째 실패입니다...' 제 반성문이 태극기와 오버랩되면서 펄럭이고 있었습니다. 중위는 웃음을 참으며 다 쓴 제 반성문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무전병 후임을 혼내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좋아! 00 병장은 반성문에 군인정신이 가득해! 그런데 너는 죄송하단 말만 계속 쓰고 이게 뭐야! 무전병 후임의 입술이 대빨 튀어나왔습니다. 저랑 중위만 유재석처럼 오므린 입으로 웃음을 머금고 있었습니다. 아, 이 주체할 수 없는 반성의 재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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