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함

2019.10.31 16:42

은밀한 생 조회 수:849

내일이 11월이네요.

1과 1이 나란히 있고,
나뭇가지가 점점 깨끗해져 갈수록 혹시 내가 잘못한 적이 없는지 자꾸 생각하게 돼요
용서를 구할 사람이 어딘가에 있는데 애써 외면하고 사는 기분이 들어요.
나이를 먹을수록 뭔 죄책감만 자꾸 이렇게 늘어가는지 주제에 수녀님이 될 것도 아니면서....

연민을 배제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해요
자칫하면 그가 원하지 않는 관심을 주고 그의 자존심을 건드릴 뿐인 연민도 많으니까요
걱정도 안 하려고 해요
걱정대로 삶이 흘러간다는 짐작이 종종 현실로 나타나기도 하고 누군가를 걱정한다며 내뱉는 말이 실은 저주인 경우가 많잖아요
걱정할 일은 걱정해서 해결될 게 아니고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일은 걱정을 할 필요가 없으니까.
하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쉽나요

언제나 그 사람이 밥은 잘 먹었는지 밤에 이불은 잘 덮고 자는지 외로운 건 아닌지 혹시 돈이 필요해서 초조한 건 아닌지... 걱정이 돼요.

오늘 친구가 오랜만에 연락이 와서 우울증 약을 먹고 있고 이혼 소송 진행 중이란 얘기를 들었어요.
둘만 있을 때 행해지던 폭력을 아이들 앞에서도 휘두르는 남편에게서 이제 도망쳤다고.
결혼한 이후로 지속된 폭력을 참아왔다는 친구가 가끔 주고받은 연락에서 난 괜찮아. 했던 말들이 갑자기 아득해졌어요.
폭력을 당하고 있다는 걸 전혀 얘기하지 않아서 어쩌다 이 친구가 남편이 말을 좀 거칠게 한다고 하길래 괜찮냐고 물은 게 다였거든요..

저는 고교 시절에 이 친구가 피아노 천재라고 생각했어요
딱히 개인 레슨을 받은 것도 아닌데 고1 때 리스트를 유려하고 광활하게 연주하던 아이였죠
음대 입시 준비할 때 이 친구의 재능을 높이 산 교수가 거의 무료로 레슨을 해줘서 장학생으로 음대에 들어갔어요
모두 있는 피아노가 얘만 없어서 대학 강당 피아노로 연습하다, 그 특유의 힘없이 떨리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좀 불편하긴 해 근데 괜찮아 하며 웃던 얼굴이 늘 생각나요.

부모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과외로 학비를 벌고 장학금을 받으며 힘들다며 울기보다 싱긋 미소를 자주 짓던 그 애의 순순함이 좋았어요. 꾸밈없이 조용하고 정직한 친구였죠.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돌이켜보자면 알 것도 같은 순간이 생생히 기억은 나요.
이제 와 생각하니 오지랖이란 그럴 때 쓰는 게 아닐까 후회가 될 정도로 이 친구의 선택에 대하여 당시 이 친구 속 사정을 자세히 아는 유일한 친구였던 내가 집요하게 그 선택을 말려야 했었나도 싶고.....

하지만 꼭 그래서만은 아닐 것도 같으면서 마구 마음이 엉켜버려요.

7살 때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신 뒤로 늘 사랑받지 못하는 외로움에 마음이 눈물로 가득하게 됐다는 고백을 들은 뒤로, 저는 이 친구의 모든 선택과 이야기에 대해 무조건 지지해주고 존중해주는 게 얘를 위하는 거라 마음먹었던 것 같아요.

이 친구에게 이제 제가 해줄 수 있는 건 함께 산책을 하고 따뜻한 밥을 사고
아무 때나 이 친구가 저에게 마음을 털어놓으면 들어주는 것뿐인데.
마침 그 애가 피신해있는 집이 저의 직장 근처라서 오늘 당장 보자고 하니까 괜찮아지면 연락한다는데..... 뭘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사는 게 참 뭣 같아서 울고 싶습니다. 좀 사랑하고 아껴주지... 외롭고 힘들게 살아온 애를...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30040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9037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9343
110318 [카덕카덕] 1등 먹었습니다 + 아이유 무대, 결국 뮤직뱅크 잡담. [18] 로이배티 2010.12.10 3800
110317 윤종신 나가수 출연할듯... [10] 그리스인죠스바 2011.08.10 3800
110316 영국식 발음이 자꾸 끌려요 [23] Apfel 2010.10.15 3800
110315 한국전쟁에 대한 가장 깊이있는 책은 무엇인가요? [11] 리이스 2010.06.17 3800
110314 내가 핸드폰으로 누구랑 언제 어떻게 통화했는지 [5] 지금은익명 2010.06.15 3800
110313 영화 카트에 아이돌 출연은 신의 한 수 였군요. [16] Bigcat 2014.11.24 3799
110312 그래비티 대실망입니다. (노스포) [18] 다펑다펑 2013.10.28 3799
110311 ㅂㄱㅎ은 또 TV 토론 거부를 했군요 [10] amenic 2012.12.13 3799
110310 어느 영화감독이 본 영화 '26년' (스포 무) [10] soboo 2012.11.30 3799
110309 배구여제 김연경의 말중에 깊이 와닿았던 한마디. [4] skyworker 2012.10.19 3799
110308 전두환 집 터는 101가지 방법 [10] 오키미키 2012.05.17 3799
110307 태풍 대비 어떻게 하고 계세요? [34] amenic 2012.08.27 3799
110306 (바낭) 십자가에 못 박히는 꿈을 꿨어요. [8] 쏘쏘가가 2012.02.20 3799
110305 바낭) 결혼정보회사에서 전화 받았어요. [17] 화려한해리포터™ 2012.08.07 3799
110304 아예 정명훈을 묻으려고 하네요 [6] 헬로시드니 2011.12.06 3799
110303 색드립이 난무하는 오늘 자기야... [5] 도야지 2011.09.23 3799
110302 역시 '나는 가수다'에서 탈락하면 자존심에 스크래치 갈 거 같네요. [4] 자본주의의돼지 2011.03.02 3799
110301 전효성 감상하죠.swf(자동재생) [16] 루아™ 2010.12.01 3799
110300 오늘 이런일이 있었어요. [16] dlraud 2010.09.20 3799
110299 [듀나인] 선블록 추천 바랍니다. [11] 서리* 2010.06.11 3799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