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서열이 얼마나 사실에 부합하는지 모르겠고, 관심도 없고, 상관도 없습니다만.. 지난 몇 년간 이 목록에 얼마나 자주 노출됐던지 언제부턴가 외우고 있더군요.
과거에도 이랬나를 생각해보니, 대학 서열의 인식이 없진 않았죠. 그래도 대개는 '천박하다'라는 인식도, 비록 위선적이었을지라도, 있었기에 대놓고 학벌 서열에 따른 계급의식을 드러내는 일은 금기시되는 일 아니었나 기억합니다.
물론 표출되지 않았을 뿐 학벌 서열에 따른 계급의식은 기저에서 작동하고 있었고, 오늘의 양상은 그 연장선 상에서, 익명성과 무한의 파급력을 가진 인터넷 매체와 결합하며 드러나게 되었을 뿐이라 이해돼야겠지만.
비판과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이에 아랑곳 없이 사회적으로 공인받은 차별적 계급의식은 다양한 선발 제도의 도입과 맞물려 같은 학교 내에서도 지균충, 기균충이란 계급의 분화를 낳았고, 학생들은 이같은 의식을 고교 동문 점퍼로 전시하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고등 교육에서조차 이같은 현상이 관찰된다면, 초중등 교육을 받는 아직 미성숙한 아이들이 이백충이니 빌거, 휴거와 같은 멸칭을 주워섬기는 것도 이상하지 않죠. 이들의 인식을 형성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을 부모들과 교육계의 '어른들' 까지를 염두한다면, 계급과 차별 의식은 '사회에 만연해있다'해도 과언이 아닐겁니다. 표층의 미시적 분화와 심층의 거시적 획일화라 하면 좀 그럴 듯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이같은 현상을 두고, 우리 사회는 어디로 향하고 있다 해야 할까요, 양극화? 계급의 고착화? 경쟁과 갈등의 심화?
다양하게 말해질 수 있겠지만, 저는 '수치심을 모르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하고 싶어요. '양심'을 잃어버린 탓에 더 이상 수치심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고.
---
한동안 침묵하던 진중권이 몇개의 글을 연달아 올렸죠.
'진실을 말하는 동양대 교수'에 대한 윤리적 '비난'으로 이어지는 글은 서초동 집회의 자유발언 영상으로 시작되는데, 생각이란게 있다면 감히 공개하지 못했을 이 영상에는 [정경심 교수의 서울대 후배, 조국장관이 권력을 이용했다면 선배를 먼 지방대학에 두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타이틀이 붙어있어요. 말한 것처럼, 이들에겐 자신들의 언행이 부끄럽다는 인식이 없는거겠죠.
조국 청문회 과정에서 민주당의 김종민은 "고려대 학생이 동양대학교 표창이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솔직하게 얘기해서"라는 발언으로 유사한 인식을 드러냈고, 이철희의 "지위를 가진 분들에게 열려있는 기회" 발언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죠.
집회에 참여한 필부(꼼꼼한 '서울대 후배'에도 불구하고)에서 대중 정치인까지 누구나 거리낌없이 학벌과 계급에 따른 차별 의식을 전시하는 사회에서 '사람', 혹은 '사람의 가치'는 더 이상 보편 개념일 수 없겠죠. 들춰보면 어디엔가 '~등급의'라는 꼬리표가 붙어있을테니까요. '사람이 먼저다'는 다를까요?
'고졸 대통령'의 배출을 뿌듯하게 여기면서도 한편으론 '사시패스면 서울법대 이상'이라며 서열에 편입시키고 마는, 대통령 스스로가 이를 자신의 '약점'이라 말하는 사회, '경희대 출신 대통령'은 '사법연수원 차석'이라 강조하는 현실은 이 사회의 성원들이 계급과 서열이라는 질서를 얼마나 뿌리깊게 내면화하고 있는지 드러내죠.
일국의 통치자라도 예외는 허용되지 않고,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예외일 수 없는지도 모릅니다. 한국 사회에서 계급주의와 차별주의는 '도전받지 않는, 그리고 도전받을 수 없는' 지배 이념인거죠. 민주주의, 공화주의, 법치주의의 이념은 자주 도전받아 왔지만.
---
학벌만의 문제는 아니겠죠. 다양한 가치들이 공존하는 사회이니만큼 학벌 외의 속성들로도 사람의 등급과 서열을 매길 수 있으니까요. 어떤 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자산이나 소득, 외모가 학벌보다 중요할지도 모릅니다. 학벌이란 일종의 악세사리일 뿐 그 자체로는 사실 아무 것도 아니라 말하는 이들도 있고, 이 지점에서 이미 미래가 결정되는 것이라 여기는 이들도 있죠.
무엇이 옳은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 사회가 추구하는 다양한 가치들에도 불구하고 그 중에 '양심'의 자리는 없을리라는 것 정도는 말할 수 있을겁니다.
허위 혼인신고의 전력이 밝혀지자 마치 그게 '이혼 전력'의 문제인양 변명하는 자가 인권법을 가르치고, 누차에 걸쳐 대중을 상대로 거짓말을 늘어놓은 파렴치한 범죄 피의자가 형법을 가르치는 '서울대'가 학벌 서열의 정점이 되고, 또 저들이 정부의 고위직으로 권력을 쥐는 사회에서 '양심'이란 무가치한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일상의 경험칙이 명목상의 규범과 충돌하면 경험칙이 우선하게 마련이니까요.
'걸리지 않으면 그만'인거고, '부끄러움은 순간이지만 이익은 영원'한거죠. 그러다 언젠가는 그 부끄러움조차 가질 수 없게 되는거고.
이런 의식은, 혹은 그 토대가 되는 경험칙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코카인 갱과 맥도널드로 예시되는 착취 구조는 불평등한 보상을 통해 경쟁을 자극하는 것으로 유지된다고 하죠. 이에 따르면 당락을 가를 점수 몇점에 매달려야 하는 경쟁 사회의 요체는 경쟁의 결과가 이후의 삶을 좌우하도록 설계된 보상 체계입니다. 인간성의 황폐화는 이 경쟁의 부산물이라 해야겠죠.
경쟁의 끝에 정점을 차지한 이들에게는 피라미드의 하부 말단에 대한 책임감이 요구되지 않고 기대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이들에게 주어진 차별적 특권은 경쟁에서의 승리에 따른 정당한 보상으로 여겨지고, 이들은 삶을 관통하는 경쟁 속에서 양심을, 사회적 연대와 평등 의식을 접하거나 배운 적이 없어요. 오히려 연대를 부정하고 차별을 내면화하도록 주입받았죠.
도로공사의 이강래, 한국전력의 김종갑, 서울메트로의 이정원이 그들의 전임자보다 형편없는 인간들이라 단언할 수는 없을거예요. 그들은 단지 운이 없었다 해야 할지도 모르죠, 그 자리에 누가 앉는대도 마찬가지인 거라면.
---
최근 게시판에서 오간 학종과 정시 논쟁이나 남성 권력 논쟁을 보며 드는 생각은, 특권적 계급이 존재하고 이들을 정점으로 하는 피라미드 구조가 유지되는 한, 누가 그 정점을 차지하는지가 중요할까 하는 겁니다. 새롭게 그 자리를 차지할 이들이 특별히 더 양심적이거나 선할 것이라 기대할 수 없다면 줄 세우는 방법을 좀 바꾸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문제의 원인, 구조를 근본부터 뜯어고치지 않는다면 어떤 해법이라도 임시방편의 고육책에 불과하겠죠.
소수의 엘리트에게 자원을 몰아주는 구조는 자원의 총량이 부족하던 시절에는 나름대로 합리적 생존전략이었겠지만, 지금은 그 구조를 유지할 당위가 희박합니다. 자원의 투입 뿐 아니라 보상도 마찬가지고 역할에 따른 차등 보상이 정당할지라도 그게 현재의 격차일 필요는 없어요.
그럼에도 이런 구조를 유지하는 이유가 있을겁니다. 막연한 믿음의 한 축은 '경쟁이 효율을 낳는다'는 시장 법칙에 근거해 있을텐데, 사실 성장률은 불평등도과 음의 상관관계를 갖죠. 이를 인과로 해석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oecd의 '소득 불평등이 경제 성장에 미치는 영향(trends in income inequality and its impact on economic growth, 2014)' 보고서는 '소득 불평등의 확대는 성장에 상당한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실증되었다'라 적시하기도 했죠.
한 사회의 효율은 경제 성장 외의 다양한 방식으로도 말해질 수 있습니다. 행복도, 사회 신뢰도, 직무 만족도 같은 주관적 지표도 있겠고, 이와 밀접한 인적 자원의 최적 배치 같은 문제는 양화해서 측정할 수 없기에 그만큼 평가와 보상의 설계에 주의가 요구됩니다. 부실한 평가와 부적절한 보상은 사적 이익을 위해 공적 이익을 훼손시킬 동기를 형성시키게 되니까요. 권력의 상층부에서 '대선 진로 딱 좋은데이'의 조국 센세 같은 케이스가 발생하는 동안, 하층부에서는 '로린이'찾는 교사 같은 케이스가 발생하게 되는거죠.
나경원은 어떻게 판사, 국회의원이 되고 황교안은 어떻게 장관과 총리를 역임할 수 있었느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사회의 평가와 보상 체계가 그들을 걸러내지 못할 뿐 아니라, 획득된 지위가 유리바닥으로 작동하도록 설계되어있기 때문이죠. voight-kampff 같은 검사법이 없는 이상(있어도 문제지만..) '평가'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고, 이는 '보상'과 '징계'로 보완돼야 함에도 우리 사회에는 그런 장치가 부재하거나 잘못 설계돼있어요. 대구에서 집유로 풀려난 김현철이나, 빵꾸뽄드라는 귀여운 애칭을 가진 이정렬은 '재수가 없어 걸려도 잠깐 쪽팔리면 그만'이도록 설계된 의료법과 변호사법이 낳은 폐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문직 자격뿐 아니라, 나경원 아들의 스펙쌓기를 비판하며 '연구 비리'에 연루된 연구자들에 대해 침묵하는 것도 우리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보여주는 예라 할 것입니다. 윤형진을 비롯하여 논문에 참여한 연구자들은 모두 비리의 공범이거나 방조범일텐데 이들에 대한 징계나 학계의 자성은 기대하기 어려운게 현실이죠. 이 사회는 '생존'을 위해 불의를 방조하고 침묵하고 때로는 타협하거나 복무하도록 구조화되어있기 때문에, 이에 저항한 소수의 용기있는 자들은 퇴출되고 남아있는 자들은 또 '경험칙'을 학습합니다. '정도의 문제'라 자위할 수는 있겠지만, 실은 양심이 자기정당화 기제에 의해 마비되고 있을 뿐이죠.
'직업 윤리'같은 건 농담에 불과한 사회에서, 교사나 공무원 지망생들은 '직업 안정성'과 '복지'를, 전문직은 '소득'을 직업 선택의 최우선 동기로 여깁니다. 효율도 의심스럽지만, 직무 특성으로 인한 위험이 더 큰 문제죠. 저들이 대개 평균인의 윤리의식은 갖고 있으리라 기대됨에도 불구하고.. 우리 제도는 자격 획득만을 어렵게 하고 획득한 자격을 유지하기는 쉽도록 혹은 보장하도록 설계되어 있고, 여기에 부실한 평가 및 보상이 결합하면서 필연적으로 사회에 위험을 초래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systematic failure죠.
고대에서 퇴출당한 그 친구는 결국 의사가 되고야 말거라죠?
---
승자독식의 불합리한 분배 구조의 개선에 반대할 다른 논거로는 인적 자원(...정마에?)과 자본의 유출이 있을텐데, 일단 조선은 언어 및 문화적으로 고립되어 있는데다 마땅히 갈만한 곳을 찾기도 힘들죠.;; 제가 노상 헬조센이라 까지만 객관적으로 이 정도면 제법 괜찮은 나라죠. 일단 떠난 사람들도 아프고 힘들면 돌아오는 걸 보면 살만한 것 아니겠어요? 유승준도 좋은 예가 될지 모르죠.
이런 반론은 사실 숨겨진 다른 논거들, 이를테면 '인간 본성'에 의거하겠죠. 지배욕, 과시욕, 차별욕구 따위로 말해질 수 있을텐데.. 어느 선생 말씀으론 인간이 신과 동물 사이의 가교라 하니, 동물의 왕국 찍을거 아니면 욕망은 제어되어야겠죠. 그러라고 있는게 국가고 공권력입니다.
이 얘기는 자주 하게 되는 것 같은데, 제 어머니는 '돈 있으면 한국처럼 살기 좋은 나라도 없다'라 하시곤 하죠. 그분이 바란 것과 달리, 어쩌다 보니 우울 종자로 자란 저는 비 오는 가을 밤에 재활용 쓰레기 더미를 뒤적이는 노인을 보며 '살기 좋은 나라'란 것에 대해 생각합니다. 어머니는 저 노인들과 마주칠 일이 없는 것일까, 마주치더라도 고통스럽지 않은 것일까. 마주칠 일이 없다면 알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 사랑하는 이 마을을 떠나면 나는 조금쯤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일까.
제 말로는 공부를 곧잘 한다지만 아무래도 믿음이 가지 않는, 그닥 영리하다고는 못 할, 정직하고 상냥한게 가장 큰 장점인 조카 아이와 집 앞 골목에서 마주치곤 하는 이름 모를 동네 아이들을 바라보는 마음이 다르지 않고, 그들이 살게 될 사회가 제가 아는 것보다 나은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램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사회를 만들 자신도 없고, 그리 될거란 기대도 없기에 인구재생산의 중책(...)을 포기했지만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을 떨쳐낼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더 나은 미래 같은 건 없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최선은 이미 오래 전에 지났을지도 모르죠. 나라가 망한다는게 어떤 것인지 와닿지도 않고, 저 자신도 착실하게 죽어가고 있기에 그게 걱정되거나 하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사회가 좀 더 나은 것이어야 한다고 부질없는 발악이라도 할 이유가 있다면, 킹갓 방드라디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아직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기 때문이겠죠.
---
친절한 3줄 요약:
한국 사회는 버그로 가득한 쿠소게 같은 겁니다.
강제로 이 게임에 던져진 플레이어들은 늦든 빠르든 치팅을 배우게 되고, 말도 안되는 난이도에 gg를 치고.
이 장문의 글의 첫 댓글을 핵뻘플로 : 사실 저 타락씨님 글 좋아하는데 말입니다(...) 솔직히 저랑 생각이 안 맞을 때도 많고 가끔은 특유의 표현 스타일이 좀 버거울 때도 있긴 하지만 뭐 암튼 대체로 그렇습니다. 쿨럭;
타락씨님의 우울이 좀 잦아들 수 있는 그런 패치가 이루어진 나라에서 살고 싶네요. 언젠가는. 뭐 맘 편하게 이미 글렀다고 말해버리고 싶지만 그래도 어차피 다른 나라로 튈 능력도 기회도 없는 입장이니 그런 희망이라도 아예 놓지는 말고 살아야할 것 같은 의무감(?) 같은 게 있습니다.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바로 그 선지자 방드라디님의 가르침을 거역한 인간인지라(...)
궁금한데 그런 희망적인 나라가 대체 어디일까요? 한국처럼 계급이 고착화되지 않고 부정부패가 없고 사회 모든 곳곳에서 공정한 거래와 채용이 이루어지고 정치인들은 깨끗한 나라가 어디인지 궁금해집니다. 미국만 해도 자본주의의 극단으로 인해 계급의 격차가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심하고 제가 사는 곳만해도 채용이 공개채용보다는 알음알음으로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물론 소개를 해도 시험과 면접을 거쳐 선발하니까 부정은 아니라고 해도 아는 사람이 없으면 아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한국사람 기준으로는 엄청난 부정이겠죠. 정치인들 - 당연히 부패했습니다. 심지어 기업이 대규모 정치 후원금을 내는 것도 합법입니다. 베이비 부머 세대가 젊은 세대에게 빨대 꽂고 살면서 ‘요즘 젊은 것들은 근성이 없다’고 투덜거리는 건 전세계 공통인 현상이고요. 나경원 아들은 논문부정이 사실이라고 해도 예일대에서 쫓겨나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북유럽만이 유일한 답일까 싶지만 거기는 또 햇빛때문에 우울증이 생길 것 같고요.
제 생각엔 일단 복지, 사회적 안전망이 지금보다 확충되는 게 우선이겠고 그 방법에 대해선 이미 타락씨님께서 저랑 같은 의견을 말씀하셨으니 패스하구요.
좀 쌩뚱맞게 보이는 얘기지만 기술직에 대한 대우가 지금보다 훨씬 나아져야할 것 같아요. 굳이 대학 나오지 않아도 익힐 수 있는 기술로 먹고 사는 분들 말이죠. 제도적으로 어떻게 해야할진 모르겠지만 그런 쪽으로 변화가 있어야 한국의 십대들이 지금보단 덜 괴롭힘 당하고 학부모들도 좀 덜 돈낭비하고 결과적으로 다음 세대들이 좀 살만해지지 않을까 하는 느낌적인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적고 보니 다 먹고 사는 얘긴데, 사실 이게 먼저 안정이 되어야 사람들이 좀 더 폼나고 아름다운 변화(?)에도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될 거라고 생각해서 말이죠. '정의'나 '평등'같은 거 말이죠.
며칠전 이자스민 전’새누리당’ 비례대표의원이 정의당에 입당했다고 하네요. 여초 반응은 예상한대로 99프로 네거티브입니다만, 역설적으로 이 사람의 정치적 자산이 여성, 이주민 (더하자면 농어촌7,80대 고령자들..이 사람 지지층이 여성이주민들 + ‘시어머니’까지 포괄한다 하죠) 상징성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지역의 낙천적 탄력적 현실적 성격까지 한몫 하는거 같아 기쁩니다. 이자스민 의원 인터뷰에서 어떻게 버텨냈냐는 질문에 본인 성격을 들면서 저렇게 묘사했거든요 :)
타락씨님이 말씀하신 ‘행복도’는 우울의 대척점에 서 있는 지표라고 생각하고 이 지수를 높이는데 이자스민 전의원이 상징하는 정신가치(성격이라 해도 좋아요) 가 좋은 수단이 될수 있다고 봐요. 흔히 말하는 강철 멘탈, 유사품으로 '정신승리' '뻔뻔함' 이랑은 쫌 달라요. 막말로 내수품 아니라 외부(동남아) 에서 '수입'했다고 봐도 나쁘지 않다 보거든요, 저는. 히히 .
말이 나왔으니 하는말인데, 전 ‘정의당’ 간판을 ‘행복당’으로 바꾸면 안될까 잠깐 생각해본적 있네요...
그런 생각은 자주 합니다. 진영이나 성별의 문제가 아니라, 다같이 공통적으로 뿌리부터 단단히 물들어 있는 폭력성(울분,갑질욕구)이 문제라구요. 이 특징은 약자층에 없거나 여자에겐 없는 건 아니거든요. 누가 그 자리에서 몽둥이를 휘두를 차례냐 그 차이 같달까.그래서 어떤 프레이즈나 '~이즘'을 내세우는 사람집단은 결국 거기서 거기인 것 같고 황무지에 간간히 피어있는 꽃처럼 제법 준수한 인품의 사람들은 있죠. 그런 이를 찾아내서 대표자로 세워야하는데 그건 어렵고도 귀찮은 일이라 우리는 간판으로, 주변사람들이 퍼뜨리는 말들로 판단을 하고 그사이 "부지런한 나쁜놈들"은 대중을 현혹시켜서 앞서 나가고....
.
부지런한 나쁜 놈들을 막기 위해 인구재생산에 동참하시죠 왜. 계속 성찰?하며 열심히 사실 계획이라면.
암 생각없이 막 낳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특히나 이 쪽 주제 글은 피로해서 읽다가도 그만두곤 했는데 이 글은 중단할 수가 없었네요. 아주 공감합니다. 조국 퇴출 시위를 했던 모 대학교 학생들이 다른 캠퍼스 학생을 자신들의 시위 집단에서 쫓아냈다는 칼럼 "조국 다음이 보이지 않는다"를 읽으면서 느꼈던 충격과 비슷한 충격을 느꼈네요.
가끔은 절망도 좀 정확한 언어로 하고 싶습니다. 정쟁에 소요되는 날 선 언어들이 아니라요.
이 장문의 글의 첫 댓글을 핵뻘플로 : 사실 저 타락씨님 글 좋아하는데 말입니다(...) 솔직히 저랑 생각이 안 맞을 때도 많고 가끔은 특유의 표현 스타일이 좀 버거울 때도 있긴 하지만 뭐 암튼 대체로 그렇습니다. 쿨럭;
타락씨님의 우울이 좀 잦아들 수 있는 그런 패치가 이루어진 나라에서 살고 싶네요. 언젠가는. 뭐 맘 편하게 이미 글렀다고 말해버리고 싶지만 그래도 어차피 다른 나라로 튈 능력도 기회도 없는 입장이니 그런 희망이라도 아예 놓지는 말고 살아야할 것 같은 의무감(?) 같은 게 있습니다.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바로 그 선지자 방드라디님의 가르침을 거역한 인간인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