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을 대하는 나의 자세

2019.12.11 06:07

어디로갈까 조회 수:1178

어제 미팅 후, 처음 만난 분들과 저녁을 먹으면서 이런 말(지적질)을 들었습니다. "음식과 진지하게 대화하며 드시네요?" 
인정합니다. 식사 전에 식탁의 음식들을 곰곰 들여다보는 버릇이 있어요. 뭐랄까, 제 앞에 와 있는 생명체에게 인사하는 예의이기도 하지만,  그에 더해 그 음식을 먹는 것이 '나의 생명되기'에 해당되는 거라는 생각 때문이기도 합니다. 내가 먹는 것이 내 몸이 되는 거라는, 먹다=되다라는 인식이 또렷한 편이에요. - - 

영화 <곡성>에서 환각 독버섯으로 사육한 돼지를 도축한 고기를 먹은 마을사람들은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꿈/ 현실의 시간 속에서 파멸하고 맙니다. 그렇다고 그 영화가 먹기의 주술에서 해방된 이성주의와 합리주의를 표방하고 있느냐 하면 꼭 그렇지는 않죠.  

(샛길: 어린시절 단군신화를 처음 읽었을 때, 왜 호랑이와 곰에게 쑥과 마늘 한 줌씩만 먹으며 동굴 속에서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말라고 했을까를 궁금해 했더랬습니다.  
어른이 되고 나서, 전 이 동굴이 국내성 근처의 국동대혈일 가능성을 열어두고 이렇게 생각해봤어요. 호랑이는 호랑이-신, 곰은 곰-신으로서 새롭게 유입된 북방 이민족의 하늘-신과 새로운 자연의 이법적 계약을 맺기 위해 그 호랑이-신의 신성성,  그 곰-신의 신성성을 버리고 진정한 이류지교[異類之交]를 성취하려는 선택이었다고요. 국동대혈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나오는 고려/고구려의 동맹이라는 축제가 벌어지던 '수혈'이라는 동굴이죠.  이 동굴 속에서 호랑이와 곰은 쑥과 마늘만 먹는 고행에 나선 거고요.)

사람도 무엇인가를 먹어야 하는 '동물'입니다.  고기를 먹는다면 그 육의 주인공인  동물의 영혼과도 터치하게 된다는 느낌을 저는 갖고 있는 것이죠.  현재 육류산업의 잔혹함에서 현대 문명의 많은 죄업들이 저질러지고 있는 것을 이젠 누구나 인지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아무튼  제 입장에서는 다른 이들의 식사 속도가 빠른 것이고 너무 많이 먹는 것처럼 느껴져 흠칫 놀랄 때가 많다는 걸 밝혀둡니다. 
(근데 저도 저 같은 사람은 함께 식사하고 싶지 않은 부류에요. 저보다 더한 후배가 있어서 분명히 인지하고 있어요. 그래서 식사 자리가 있으면 제 몫의 음식은 주문 않고 죽어라 알콜만 섭취한다능~ - -;)

다시 아무튼, 낯선 이에게 그런 지적을 받으니 아찔함과는 다른 느낌인데, 어떤 생생한 흐름과 조우하면서 의식이 미세하게 떨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덧붙여 이런 말씀을 하셨거든요. " 유튜브에 먹방이 대세이지만 당신의 먹는 모습도 콘텐츠로 괜찮을 것 같다...."
저의 먹는 모습과 유튜브 콘텐츠를 일시에 해치우는 그 단순명확함이란!

저의 식사습관도 유튜브 먹방러들도 그렇게 해치워질 수 있거나 해치워져야 마땅한 것들이 아닙니다. 세상을 그렇게 단순하게 조직해 바라보시다니. -_- 
하지만 중요한 건 이런 태도가  아니에요. 그보다는 그분의 쏜살같은 해석과 태도에 대한 용의用意입니다. 그것이 저를 두렵고 놀라게 했어요.

하나의 정의나 표현에는 전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태도에는 그 기원이 있어요. 사람들이 전제와 기원으로 내려가는 것은 현상의 날카로움과 표현의 방만함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일까요.  아니면 어떤 분기점이 나오기 이전, 그러니까 동행의 시간대로 회귀하기 위해서일까요?
회귀는 종종 도착으로 착각되곤 합니다. 그러나 회귀 역시 어떤 시간의 층위에서는 전진일 수밖에 없습니다.

김수영은 도덕적인 반성의 형식으로 '나는 얼마나 작으냐'고 탄식했지만, 이 시대의 매체가 허용하는 수많은 표현형들에 압도되었다 하더라도 똑같이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거죠. '나는 얼마나 작으냐.'
모두가 모두와 다르기 때문이고, 그 다름들이 하나같이 똑같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나는 얼마나 작으냐.' 보이지 않을 만큼, 보이지 않는 모습들을 전전하며 삶을 마감할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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