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대 명절이자, 가정 불화가 매우 꽃피는 시기인 추석을 맞아, 남들 쉬는 징검다리 연휴에 못쉬고 출근한 김에 바낭으로 복수하려 올리는 글. ㅎㅎ

 

1.

 

예전 어르신들도 나름 그렇게 느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제 세대에서 우리나라의 전통문화, 예절, 제례가 급격하게 무너지는게 느껴집니다. 제 기억에 어릴 때 제사날이면 큰집에 저녁 일찍, 혹은 그 전날 가서 제사 음식을 차렸고, 제사 당일엔 이유 불문하고 저녁땐 집에 모였으며, 밤 12시가 다 되어서 제사를 지내고 각자 집으로 갔습니다. 평일인데. ㅡㅡ; 제사 자체의 절차도 엄청 복잡해서 절을 몇 번을 했는지 모르고, 축문 읽기, 태우기, 제사상 안보이게 나가서 절하고 있기 등 온갖 절차가 있었습니다. 명절 차례도 만만치않게 복잡했고요.

 

그런데 지금은 제사건 차례건 대폭 간소화 혹은 생략의 폭풍이죠. 제사땐 바쁘면 못오는거고, 차례때는 그나마 휴일이니 좀 모이지만 음식 마련이나 차례 절차는 무지 간소해졌습니다. 제가 보기엔 이건 시작이에요. 아버지 세대가 돌아가시고 제 형제 또래들이 제사와 차례의 주체가 되면, 과연 그 형식적 절차가 살아남긴 할지 의심스럽습니다. 그 조짐이, 멀리 시골까지 가서 해야하는 벌초나 묘사의 생략 혹은 아웃소싱이죠. 매년 가봤으니 맘먹고 외우면 묘의 자리 및 주인을 못외울 리 없건만, 지금까지도 그걸 제대로 외우는 분은 어르신들 뿐입니다. 그분들이 돌아가시거나 건강이 악화되어 시골에 가실 수 없게 되면, 글쎄요.. 아마 묘 자리 찾지도 못할 것 같네요.

 

이런 생략, 간소화에 대해 보수적인 어르신들은 불만이 많으십니다. 그럴때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돈 많고 잘 나가는 사람들 봐라. 조상 제사 제대로 안모시는 경우 있는가. 조상의 당시 신분이나 경력이 모셔서 자랑스러울 게 없거나(흔한 말로 상놈의 자식), 혹은 지금 지가 지독하게 못나가서 조상 덕본 게 하나 없다고 느끼는 것들이나 제사 무시하고 조상 무시하면서 다 생략하고 안하려고 하지, 가진게 많은 사람들은 조상에게 감사할 줄 안다. 그리고 그러니까 잘나가는 거다. 조상 무시하고 지 잘났다고 하는 놈들 잘나갈 수 있을 것 같냐."

 

물론 과학적으로 100% 미신이겠죠. 그리고 굳이 관계를 찾자면, 전 잘 모셔서 잘나갔다, 이거보다는 잘 나가서 여유가 생기니(즉 산 사람이 먹고 남으니) 잘 모신다, 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잘나가서 돈이 많다면 제례절차의 희생자, 제례절차를 미신, 번거로운 일 취급하는 이의 희생을 막말로 '돈으로 살' 수 있는 가능성도 크겠죠. 가진 것 하나 없이 자식에게 부양받는 아버지와, 천억대 재산을 가지고 "제사 절차에 불만을 뻥긋하는 사람에게는 한 푼도 물려주지 않겠다"고 선언한 아버지가 있는 집안 가운데 어느 집안에서 제례 절차가 잘 유지될지는(적어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사실 뻔한거 아니겠습니까. 또한 내 능력이 안되는데 누군가한테 기대서 힘을 얻고자 한다면, 훨씬 간편하게 믿을 수 있는 종교의 신을 믿겠죠. 게다가 조상의 잘 모셔서 얻을 수 있는 지금 당장의 성공이 매우 불확실한 반면, 각종 제례를 모두 반대하는 어느 종교에서는 지금은 고생하더라도 믿기만 하면 사후에 무조건 좋은 곳 간다는데 확률 높은 쪽에 배팅하지 않겠습니까?

 

2.

 

제례절차가 단순해지는 것은, 조상에 대한 공경심이 줄고 있기도 하고, 뭐 기타 등등 여러 이유가 있지만, 제사를 제대로 모시기 위해 큰 희생을 해주던 여성들이 그 희생을 거부할 정도의 권리를 가지게 된 것이 아무래도 가장 큰 원인이겠지요. 여기서 남성들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 아닐까요? 그 희생을 같이 짊어지고 절차를 유지하던가, 여성들이 참고 희생해줄 수 있는 수준의 노동만 가지고 할 수 있는 절차만 지키던가. 지금 선택의 대세는 후자인 것 같군요. 남자, 특히 어르신들이 정말 그 제례절차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전자쪽으로 선회할 것이고, 아니라면 이대로 제례절차는 무너지지 않을까 싶어요. 하긴, 남자들이 노동 안하고 받아먹기만 하는 것 자체가 '전통적이고 정통적인 제례문화'라고 하면 전자일 가능성은 없군요.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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