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간신히 한 시간 짬이 났군요.
글 못 써서 너무너무 갑갑하고 괴롭습니다. 
쓰고 싶은 글은 가득 있지만 일단 떠오르는 것은 조선해전사의 영원한 아이돌, 대왜군최종절대병기, 떠다니는 초특급 인간재해(왜군한정), 시대불문 정권불문 영원한 옵화, 임진왜란 당시 치트키 사용 의혹이 일고 있는 충무공 이순신 되겠습니다. 

자, 한 때 이 나라의 출판 인쇄를 주름잡던 동네가 있습니다. 바로 을지로지요. 요즘은 이곳저곳에 인쇄설비가 늘어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뭔가 인쇄를 하려면 그곳까지 꼭 가야했던 메카이지요.

그 곳에 있는 명보극장 - 지금은 명보 플라자로 바뀌었나요? 그 앞에 가면 버스표 판매소 바로 옆에 웬 비석이 생뚱맞게 놓여있습니다. 제가 찾아갔을 때는 쓰레기 몇 조각에 둘러싸여 요구르트 배달 수레 받침대로 쓰여지고 있었지요. 
글자를 읽어보면 이순신 장군 생가터라고 뜬금없이 쓰여져 있습니다. 바로 명보극장 앞에서 자동차가 쌩쌩 달리는 아스팔트 도로를 등지고. 다른 연구자들에 의하면 진짜 생가터는 다른 곳에 있다고는 하나, 한 때 그가 태어나고 자란 동네가 이 일대인거 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원래 그 부근은 을지로 이름이 붙기 전엔 마른내라고 했고, 이걸 한자로 쓴 건천동(乾川洞)이라고 했읍죠. 그런데 이 부근은 조선시대에 알아주는 영웅호걸전문서식지였습니다. 시대의 풍운아 허균이 적기를, 달랑 집 서른 네 채 있는 곳에서 유명한 사람들이 더글더글 있었으니 이순신을 비롯하여 원균, 유성룡, 그리고 허균 자신과 당연히 누나 허난설헌이 유년시절을 지냈다니까요.
(각종 이설이 있긴 하지만 생략)

때 마침 태어난 시기가 그럭저럭 겹치는 지라, 여기까지 보면 머릿 속에는 그림이 하나 펼쳐지게 됩니다.
유성룡이 우아하게 책을 읽으며 글공부를 하고 있는 와중, 옆에서 이순신과 원균이 정답게 멱살을 잡고 싸워대고, 골이 난 허난설헌이 종종걸음을 걸어가면 눈물 콧물 흘리는 허균이 누나를 목 놓아 불러대며 쫓아가는... 응?
물론 이거야 제 상상일 뿐. 어디 실제가 그러했겠습니까.

하지만 쪼끄만 동네 건천동에서 딩굴딩굴했을 그들의 유년시절이 어떠했을지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는 것마저 잘못된 일은 아니겠지요. 허나 역사학의 고질적 문제인 자료부족으로 이 역시 난항을 겪을 수 밖에 없는데, 다행히 이순신의 유년 시절은 조금 목격담이 남아있습니다. 뭐, 이전 어린이 위인전을 보신 분이라면 기억할 대목인지도 모르겠네요. 

"순신이는 아이들이랑 놀면서 활과 화살을 만들어 놀았는데, 맘에 안 맞는 사람을 만나면 눈을 쏘려고 했기에 어른들도 감히 군문 앞을 못 지났음."

이거 겨레의 성웅 이순신 장군이라는 버프가 있기에 망정이지 그냥 봤다간 거리의 무법자이자 상깡패가 따로 없습니다. 그나마 아이가 만든 활과 화살이기에 제대로 살상 능력이 없었겠지만... 그래도 급소인 눈을 노려서 쏜다면야 그것도 참 뭐한 이야기고, 동네 어른들마저 알아서 피할 정도라면야 그 행패야 이루 말할 수 없...
요즘 식으로 풀이하면 골목길 막아놓고 서바이벌 놀이하면서 물감총을 사람 눈에 겨누고 쏘는 셈이죠. 
당시 애들이 군사놀이하는 걸 두고 소년희라고 했는데, 공부 열심히 하는 사람이 이런 거 할 리 있겠습니까. (이 놀이에 빠져 있던 오성 이항복은 어머니의 눈물어린 훈계로 그만두고 공부 열심히 해서 과거 붙었습니다.) 역사 기록이나 난중일기에서 늘 과묵하고 책임감 강하며 성실한 충무공 이순신에게 이런 과거가 있었나, 하고 조금 의외로 여겨지기도 하겠습니다만.

그럼 이걸 까발린 사람은 누구냐.
영원한 이순신의 소울 메이트이자 동네 형아인 유성룡입니다. 그것도 무려 징비록에다가 적어놓는 바람에 빼도박도 못하는 진리가 되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기록이 품행이 단정하지 않았다, 그런 게 아니라 오히려 빼어난 기질을 보였다는 필로 "칭찬"으로 쓰여진 것이라는 데 있지요. 참고로 어렸을 때 위인전에서는 이 일화를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묘사하려고 용을 썼었습니다.
유성룡은 왜 이런 기록을 남겼으려나요? 아무래도 세 살 아래 동생이라 오냐오냐 우리 귀염둥이~ 하고 예뻐한다는 느낌이 어렴풋하게 듭니다. 무려 선조 앞에서 "우리 순신이 어릴 때 부터 알고 지냈는데 그런 애 아니거든요?" 라는 실드를 전개했던 사람인데 오죽하겠습니까. 여기에서 음식점이나 지하철에서 괴성을 내뿜으며 뛰어다니는 아새끼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팔불출 부모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저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정작 이순신 본인은 잊고 싶은 과거를 들춰내 저작을 남기기까지 한 성룡 형아 때문에 무덤에서 벌떡 일어났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만.

끝이 좋으면 어린 시절은 미화가 되는 법입니다. 고로 만약 지우고 픈과거가 있으시다면, 성웅이 되십시오. 그럼 만사가 해결됩니다.

을지로에 가실 일이 있으시면 해당 비석을 찾아보시고, 그들의 어린 시절을 추억 혹은 망상해보는 것도 재미있겠지요.


참 재미있는 게 이 세상은 역시나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이순신에게 두 명의 형님과 하나의 동생이 있다는 사실도, 그리고 율곡 이이에게도 형제 셋이 있다는 사실을 웬만한 사람들은 모르시더군요.

지금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역시 과거에 3번쯤(?) 장원하고서도 구도장원공이 하필 친형인 덕에 묻혀버린 이우를 위해 애도를.

p.s : 너무 글이 쓰고 싶어 마구 써 날렸으니 양해를.
더 쓰고 싶고 퇴고도 하고 싶지만 일단 취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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