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29 09:38
안똔체홉극장은 촬영 금지라 홈페이지에 올라온 공식 자료를 일단 사진으로 첨부... (제가 본 회차와는 배우가 살짝 다르네요)
전에 연극 햄릿을 보러 홍대쪽 극장에 갔다가 졸아버렸습니다. 몸이 피곤했던 탓도 있었겠지만, 제가 연극에 그만큼 몰입하지 못했던 탓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유명한 고전 연극을 보러갈 때는 예습은 필수라는 걸 곱씹었습니다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모든 내용을 신선하게 감상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저는 연극을 감상할 때 '연기'를 보는 걸 제일 중요시하거든요. 대본을 읽고 가면 머릿 속에 남아있는 대사나 지문이 어떻게 연기로 펼쳐지는지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냥 텍스트로 써진 대사들이 배우 특유의 목소리와 표정과 호흡을 덧붙여서 나올 때의 그 생동감이란 정말 신기합니다. 수많은 대사들이 제 예측보다 훨씬 더 다채롭게 재현됩니다.
연극 [숲귀신]의 대본만 봤을 때는 어떤 분위기의 극이 펼쳐질지 짐작하기 어려웠습니다. 러시아 이름들이 아직도 익숙하지 않고 대사들만 봐서는 그 인물들간의 관계나 각 캐릭터의 기분이 가늠이 되지 않았습니다. 특히 이고르가 이죽대는 게 그냥 까부는 건지, '숲귀신'이란 별명을 가진 흐루쇼프가 숲을 보호해야한다고 말을 하는 게 엉뚱한 말인지 진지한 말인지 분간하기 어려웠습니다. 이 극속의 남자들은 왜 이렇게 남편이 버젓이 있는 옐레나에게 대놓고 껄떡대는 것이며, 그 와중에도 또 비탄에 빠진 것인지요. 이 뼈대로서의 대본을 먼저 보니 배우들의 피와 살이 붙여진 연기가 흥미로웠습니다. 연기라는 행위가 텍스트를 해석하는 행위라는 걸 다시 느꼈습니다.
작품의 내용을 깔끔하게 정리하기가 어렵습니다. 각 막마다 사건이 일어나고 이후 4막에서 모든 게 마무리가 되지만, 이 연극의 주인공을 누구로 봐야할지 초점을 맞춰야할지요. 늙은 교수와 살면서 동네 남자들에게 계속 시달리지만 그래도 정조를 지키는 옐레나? 젊은 날을 허비해버렸다면서 비탄에 빠져 형수를 짝사랑하는 이고르? 숲을 지켜야 하고 민주적 사회를 부르짖는 흐루쇼프? 가장 중요한 인물들은 갈등으로 뒤엉키긴 하지만 그 해소는 어딘가 시원치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죽어버리고, 그 사람의 죽음을 뒤로 한채 남은 사람들은 현재의 행복에 집중하자면서 떠들썩하게 평화를 외칩니다. [벚꽃동산]의 라네프스카야나 [갈매기]의 니나 같은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그런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사건은 벌어지지만 그 안에서 인물들이 겪는 당황과 혼란은 4막의 마지막 부분에서 흐지부지 정리되어버립니다. 그렇다면 여태 지지고 볶고 했던 것은 다 무엇이었을지요.
이 극의 의의를 찾아보자면 체홉의 세계관에 대한 여러 조각들이 엿보인다는 점입니다. 자살해버리는 어떤 캐릭터는 [갈매기]의 꼬스차를 연상케하고 노교수의 젊은 부인은 병든 남편을 수발하다가 결국 사랑에 실패한 [벚꽃 동산]의 라네프스카야를 상기시킵니다. 농장을 열심히 관리하다가 결국 자기 몫을 빼앗길 처지에 놓이는 이고르의 모습은 [벚꽃 동산]에서 반대로 꿈을 이룬 로빠힌을 생각나게 합니다. 사회개혁을 부르짖는 흐루쇼프는 [벚꽃동산]의 만년대학생 빼쨔를 떠올리게 하고, 노교수의 모습은 [검은 옷의 수도사]의 꼬브린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숲귀신]이 이후 후대 작품들로 나눠졌을지도 모릅니다.
이 극이 생일파티로 시작한다는 점도 체홉의 다른 후기 작품에 대한 스케치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축하받고 싶은 허영을 가진 인물과 그 안에서 서로 나눠받는 위선의 인삿말, 잘난체, 핀잔, 그리고 그 안에서 못마땅함을 슬슬 흘리면서 겉도는 사람들... 지금까지 봤던 체홉의 작품에서 파티는 늘 혼돈의 현장이었습니다. 기어이 갈등이 터지고 떠들썩한 분위기는 삽시간에 어색해지곤합니다. [숲귀신] 역시 파티 장면은 인물들을 소개하는 동시에 갈등을 점화시키는 그런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체홉이 그려내는 파티 장면의 시끌벅적함은 제가 체홉을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합니다. 여러 인물들이 서로 섞이지 않은 채로 자기 주장을 하고 대사들을 주고 받는 그 흥겨움이 좋습니다. 그걸 보고 있으면 작은 태풍에 휩쓸려서 몸을 주체할 수 없는 것 같은 신나는 기분이 듭니다. 물론 인물들은 제각각 고뇌와 문제를 안고 있고 그건 감히 웃어넘길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여러 인물들이 어떻게든 에너지를 발산하면서 만들어내는 그 소동 자체가 하나의 음악회 같기도 합니다.
극의 전개 자체는 확실히 덜 다듬어진 부분이 보였지만 배우들의 연기는 언제나 그랬듯이 좋았습니다. 흐루쇼프를 맡은 염인섭 배우가 특히나 인상깊었는데, 연기를 보면서 잘한다, 훌륭하다, 이런 평가가 아니라 그 캐릭터를 의심할 여지없이 계속 빠져들었습니다. 옐레나를 맡은 이음 배우와 쏘냐를 맡은 김미리내 배우도 이번에 처음 봤는데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조환 배우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제가 이 극장을 계속 찾게 되는 큰 이유입니다. 시간만 있었으면 다른 배우의 버전으로도 볼 수 있었을텐데 그러지 못해 정말 아쉽습니다.
여전히 연극을 보러 다니시네요. 배우들 연기를 눈앞에서 직접 확인할 때, 그 에너지에 맛을 들이면 정말 다시 찾고 싶어지는 분야인 거 같아요. 연극 극장을 찾아가는 데는 시간과 정성이 많이 들어서 자주 보러 다니는 분들은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숲 귀신'은 모르는 작품인데 체홉의 초기작인가 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