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20 12:23
- 스포일러는 없구요.
- 스웨덴 배우 알리시아 비칸데르가 스웨덴에서 가족을 버리고 홀로 일본으로 이주해서 통역 일을 해서 먹고 사는 외로운 여자로 등장합니다. 원작 소설이 있는데 작가가 영국인이고 주인공도 영국인이었다죠. 배우를 감안한 변경 사항인 것 같습니다. 뭐 어쨌든 1989년 일본에서 사방에 벽을 치고 외롭게 살아가는 서양인 여성이기만 하면 되는 이야기라서 크게 중요한 건 아니구요.
암튼 이야기가 시작되면 이 분의 친구... 혹은 지인 한 명이 실종 상태입니다. 비슷한 또래 여성이고 미국에서 왔대요. 그러다 바닷가에서 그 분으로 추정되는 시신이 발견되고 그 분을 생전에 마지막으로 만난 우리 알리시아님께서 경찰서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습니다. 어떻게 알게된 사이냐 등등 질문을 받다가 회상 시작.
알리시아에겐 길 가다가 자기 얼굴을 찍어대는 바람에 가볍게 시비를 벌이다 연인 사이가 된 일본인 남자 친구가 있습니다. 사방에 벽을 치고 살던 주인공이지만 이 남자에겐 뭔가 특별함을 느끼고 적극적으로 다가가 연인이 되었죠. 그런데 그냥 알고 지내던 친구 하나가 미국인 여성을 소개해줘요. 미국 살다가 일본엔 방금 왔는데 일본어를 한 마디도 못 해서 집도 못 구하고 있으니 니가 도와주라고. 귀찮지만 맘이 약해서 같이 집을 구하러 다니다가 살짝 친구 비스무리한 관계가 되는데 문제는 이 막 사귄 친구놈이 나의 소중한 남자 친구에게 관심을 보이고 심지어 들이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주인공은 자기랑 엮이는 사람들이 자꾸만 세상을 떠나버리는 고약한 징크스 같은 게 있고, 그것 때문에 성격이 자폐 비슷해져서 일부러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나라로 와서 살고 있는 딱한 인간이었고. 그 와중에 모처럼 마음을 준 남자 친구에게 들이대는 이 미국 여자애가 점점 꼴 보기 싫어집니다...
- 장르가 모호한 영화입니다. 실종된 친구의 행방과 생사 여부를 놓고 미스테리를 던지긴 하는데 시작부터 60분을 훌쩍 넘기는 시간 동안 그냥 낯선 타지에서 타인들과 단절된 채 살아가는 불안정한 멘탈을 지닌 여성의 고독과 번뇌를 보여주는 데에만 집중해요. 그러다 스릴러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하면 런닝 타임은 30분 정도 밖에 안 남아 있구요. 몹시도 장르적인 클라이막스를 지나고 나면 다시 원래 하던 얘길 마무리하고 끝이 나죠. 그런데 이런 이질적인 두 분위기가 그렇게 잘 섞여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그냥 이 얘기하다가 저 얘기하고, 다시 이 얘기하다 끝나는 느낌.
- 사람들이 몹시도 싫어했던 번역제의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와 여러모로 닮은 느낌을 줍니다. 일본땅에 홀로 뚝 떨어진 서양인을 통해 고독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니까요. 여기 주인공은 일본어를 아주 잘 하고 또 홀로 사는 게 본인의 선택이고 하니 이야기의 결은 많이 다르지만 뭐 기본 설정이 그렇습니다.
1989년으로 설정된 일본 사람들, 일본 동네의 풍경들은 꽤 그럴싸하고 거기에서 21세기 미인 알리시아 비칸데르가 돌아다니는 모습들은 꽤 낯설고 고독해보이면서 보기 좋은 그림과 분위기를 뽑아내지만... 주인공의 처지가 그렇게 와닿지는 않았습니다. 위에서 말한대로 그게 본인 선택이기도 하고, 또 이야기가 좀 엉성엉성해요.
또 일본 도심에서 바닷가, 온천, 관광지로 옮겨 다니고 마츠리 풍경을 보여주는 등 쓸 데 없이 다양하게 일본의 풍경을 보여주다보니 이거 무슨 관광 홍보 영화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구요.
- 암튼 뭐... 정리하자면, 주인공의 고독과 내면을 보여주는 파트는 보기는 좋은데 그렇게 와닿지가 않으면서 너무 느리고 깁니다. 또 주인공의 이런저런 과거와 개인사가 주절주절 나오는데 그게 거의 뭐 월드 팔자 센 여자 챔피언십 우승자급이라 공감도 잘 안 가고. 그러다보니 나름 괜찮았던 마무리 장면의 감흥도 크지 않구요.
스릴러 파트는 나쁘지는 않은데 처음부터 진상이 빤히 보이는 데다가 전체적으로 분량도 짧고 되게 급하게 전개가 되어서 좀 쌩뚱맞은 느낌이구요.
되게 재미있는 영화는 아니에요. 사실 어제 보다 한 번 졸아버려서 중간부터 다시 봤습니다. ㅋㅋ
그럼 예술적으로 잘 만들었냐... 는 건 제가 쉽게 판단할 부분이 아니겠지만 별로 그래 보이진 않았습니다.
꼭 보셔야할 영화까진 아니고, 그냥 우리의(?) 아름다운 비칸데르님께서 80년대 일본에서 헤매고 다니는 독특한 풍경을 원하시는 분들만 보셔도 될 듯 하네요.
- 근데 알리시아 비칸데르는 중요합니다. 네. 아주 중요해요.
한 시간 오십분 정도의 런닝 타임 중에 최소 한 시간 삼십 오분 정도는 화면에 잡힐만큼 혼자 다 해먹는 주인공인데 늘 예쁘고 아주 예쁘면서 종종 너무 예쁩니다.
게다가 연기도 좋아요. 애초에 칙칙하고 속마음 안 드러내는 답답한 캐릭터라 크게 매력적이진 않지만 그래도 나름 설득력있게 잘 소화해냅니다.
알리시아 비칸데르 좋아하는 분이라면 그냥 배우 구경한다는 맘으로 감상하시면 후회는 없으실 듯.
- 주인공 남자 친구로 나오는 배우가 시종일관 나름 씬스틸러였는데... 너무나도 80~90년대 일본 배우식으로 느끼한 마스크에 연기도 뭔가 허세스러운 느낌이라 보기 부담스러워서 그랬습니다. 주인공이 이 분에게 반하는 과정도 좀 얼렁뚱땅인데 배우도 매력이 없으니 이야기가 무너지는 느낌. =ㅅ=;; 아마 캐릭터가 워낙 얄팍하고 무매력이라 더 그래 보였을 거긴 한데 어쨌든...; 뭐하시던 분인가 하고 검색해보니 일본 인기 아이돌그룹 '엑자일'의 멤버더군요. 화보 사진들을 보니 그래도 멀쩡하게 잘 생기신 것 같던데 영화 속 80년대 스타일이 너무 독하게 잘 어울렸던 게 문제였던 것 같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리고 실종된 친구로 나오는 배우는 별 느낌은 없었는데... 이 분이랑 주인공, 남자 친구가 셋이 어울려다니는 장면들만 보고 알리시아 비칸데르가 의외로 키가 작네? 라고 생각하다가 키가 168이라는 걸 찾아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남자 배우는 키가 187이라고 하는데 이 분도 키가 큰 편이었나봐요. 영화 속에서 비칸데르가 거의 무슨 박정현급 체구로 보이거든요. ㅋㅋ
- 오프닝에서 주인공이 일 하는 모습을 잠깐 보여주는데 비디오 테이프로 외국 영화 자막을 만들고 있습니다. 근데 화면에 비치는 영화가 바로 '블랙 레인'. ㅋㅋㅋ 미국인 형사들이 일본에 와서 야쿠자들 때려잡고 깽판치고 다니는 영화라서 일부러 넣은 것 같은데, 마침 그때쯤 크레딧이 제작자 이름이 뜨는데 그게 바로 리들리 스코트입니다. 시종일관 농담 한 번 안 나오는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웃었던 장면이네요. 근데 찾아보면 또 블랙레인이 1989년 영화가 맞으니 어쩌면 원작에서부터 나온 장면일지도 모르겠네요. 실제 작가가 딱 그 때쯤에 일본에 가서 한참을 혼자 살아 봐서 그 경험을 바탕으로 썼대요.
- 원작 소설은 어떤 내용인가... 하고 찾아보니 뭐 내용은 대략 비슷해 보이긴 하는데, 그보다 눈에 띄는 게 '순수 문학과 장르 문학의 결합' 운운하는 찬사들이었습니다. 애초에 원작이 그런 성격이었나봐요. 근데 그 해에 이것저것 수상도 많이 하고 주목 받았다고 하니 소설의 완성도가 영화보다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독서 좋아하시는 분들은 영화 내용에 관심이 가면 책부터 읽어 보셔도.
+ 뻘생각이지만. Earthquake Bird를 '지진새'라고 번역했는데. 이렇게 번역할 생각이라면 '지진조'가 낫지 않으려나요.
네. 적고 보니 정말 뻘생각이네요. ㅋㅋㅋㅋ
2019.11.20 12:59
2019.11.20 13:29
말씀 듣고 찾아보니 '천공의 성 라퓨타'의 모델이 된 섬이라는 얘기도 나오네요.
조그맣고 한적한 곳이라고... 하는데 후쿠시마 근처라니 그건 좀 무섭네요. ㅋㅋ
2019.11.20 14:46
그 실종된 친구, 무려 엘비스 프레슬리의 손녀인 라일리 커프입니다. 얼마전 <언더더실버레이크>에서도 실종 되더니 여기서도...
2019.11.20 15:22
배우 성이 어려워서 못 읽다가 엔드 크레딧 올라갈때 가타가나로 '키-오' 라고 적혀 있어서 희한한 이름이라 생각했는데...
말씀하신 김에 검색해보니 '커프'라고도 하고 '키오'라고도 하고 그러는 희한한 이름이네요. ㅋㅋ
매드맥스의 그 분이라는 것도 방금 검색해보고 알았습니다. 매드맥스에선 되게 모델 같고 여신 같은 스타일로 나왔는데 이 영화에선 걍 평범하게 예쁜 미국인 여성으로 나와서 전혀 못 알아봤네요. 엘비스 프레슬리 외손녀라니 배경도 어마어마하네요. ㅋㅋ
2019.11.20 15:29
2019.11.20 15:30
2019.11.20 19:24
2019.11.20 21:17
헐... 비칸데르 외모에 단점이라는 게 있다고요???
2019.11.21 09:44
2019.11.20 21:25
2019.11.20 21:17
2019.11.20 21:28
2019.11.21 12:11
80년대 일본 배경에 아무리 스타일을 예전으로 꾸며도 그냥 현대의 여신인 비칸데르가 돌아다니는 그림 만으로도 뭔가 이질감이 있으면서도 매력이 넘쳐서 언급하신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재밌게 봤네요. 일본어 대사 비중이 너무 높아서 놀랐는데 비칸데르가 엄청 노력한 모양이에요. 원어민 수준은 아니어도 설정처럼 일본에서 5년 산 외국인이라고 믿어지더라구요.
2019.11.21 12:43
2019.11.21 14:42
일본 관광 홍보 영화인가,라는 생각 저도 들었는데 가고 싶은 생각이 들게 아름답게 나온 사도라는 섬을 찾아보니 역시나. 동북쪽이더라구요. 후쿠시마현에서 멀지 않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