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순간을 지나며

2019.11.07 05:45

어디로갈까 조회 수:760

1. 대체 왜 저는 수요일마다 좋아하지도 않는 화성에 가서 마음고생을 하고 오는 걸까요? 
이유는 두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시점에 가면, 수요일마다 화성에 가서 외계인들을 만나 우주의 평화를 위한 토의를 하겠노라고 답하는 제 희미한 "yes"가 보스의 책상 어딘가에 떨어져 있을 거예요. 별 계산/고민 없이, 단지 'no' 라는 단어를 내뱉기 싫어서 선택한 'yes'였죠. 언제나 발등을 찍는 건 자기 손에 들린 '나'의 도끼지 남의 것이 아니라는 속담은 만고의 진리입니다. 

곰곰 들여다보면, 선택과 행동의 윤곽은 감정의 핵심에 비해 어설프고 우스꽝스럽기만 해요. 그 내부를 들여다 보면 금방 어리석음이 발견되죠. 그리고 조금 더 들여다 보면 안개 자욱한 새벽, 아무런 내면도 없이 온갖 생각들이 서로 부딪치며 내는 소음의 네거리에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우두커니 서 있는 자신이 보일 뿐입니다. 

2. 일찍 잠이 깬 김에 두 시간에 걸쳐 집안 정리를 했어요. 다림질을 하거나 청소를 하거나 설거지를 하거나 손빨래를 하는 일에는 뭐랄까, 견고한 구체성의 감각이 있습니다.
푹신한 소파에 얼굴을 묻고 구름처럼 흘러가는 기억들을 선명히 바라볼 때 느끼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구체성이지만, 꽤 흡족한 시간이에요.
널려 있던 책들을 정리하고 말끔하게 정돈된 책상을 대하노라니,  글쓰는 상황이 가장 멋있게 묘사된 장면으로 꼽고 있는 <닥터 지바고>의 한 장면이 떠올라요.
러시아의 설원. 라라와 단 둘이 머무는 눈 덮인 집에서 라라가 한 쪽에 잠들어 있는 동안 지바고는 조용히 글을 쓰죠. 이 책을 처음 읽던 열몇 살 때, 그 부분에 메모를 붙이며 참 서정적인 장면이라고 감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닥터 지바고처럼 글을 쓰지 않고 방바닥에 뒹굴거리면서 쓴다, 고 어느 소설집 서문엔가 적혀 있었던 게 생각나네요. 멋진 책상 앞에 앉아 잉크에 펜을 찍어 영감의 광풍에 휩싸여 집필을 하는 게 아니라, 조개가 모래바닥을 기어가듯이 쓴다는 뜻이었을 겁니다. 
또 하나 기억나는 건 런던에서 본, 망명 중이던 레닌이 숨어서 글을 썼다는 1평 남짓 밖에 안 되어 보이던 쪽방입니다. 자신의 전부를 걸고 쓰는 밀도 높은 글이 지어질 법한 공간이었어요. 구경하고 나오는데 마침 발신지가 북한으로 되어 있는 소포상자 하나가 그곳에 도착해 있어서 신기해 했던 기억이.

3. 서점에 가면 (온라인에서도) 사려던 책 외에 꼭 곁들여서 시집을 두어 권 구입합니다. 그게 제가 시인들을 후원하는 방식이에요. 어젠 그냥 맘이 동해서 모르는 시인들 시집만 여덟 권이나 사 왔어요. 
좀전에 그것들을 정리하다 보니 몇 갈래로 그룹이 만들어지더군요. 초현실적인 환상들이 20% 가량, 감상적인 인생파조의 시들이 20%, 구체적인 삶의 이미지가 들어있는 시가 10%, '나는 고독하다'의 관념적 은유들이 20%, 잠언조의 짧은 시들이 10%, 자연에 동화되거나 도피하는 시들이 20% 정도 됩니다. 
현실에서 시인들을  아는 사람들이 그들에게서 보는 것은 아마 잠언시나 감상적 인생파 시에서의 시인들일 것 같아요. 환상과 고독은 어쩐지 공유되지 않을 듯합니다. 그게 원래 그런 것인 거죠.

4. 스탠드 받침대에 서 있는 도자기 토토로 인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쳐다봅니다.
토토로: 왜 그렇게 애쓰며 뭐든 하려고 하는데?
어디로갈까: 어떤 자세에 대한 열망 같은 거겠지. 지금은 가능하지 않지만 정신의 시동을 걸어두는 거랄까.
토토로 : 그런 걸 왜 원하는거야?
어디로갈까:  글쎄...  허영 때문일까?
토토로 : 어떤 이들의 준비 동작은 분명 그렇지 않지만, 너의 경우엔 좀더 생각을 해보기 바라.
어디로갈까: 알았어. 그건 그렇고, 도토리나 좀 먹을래?

창 밖을 보니, 건물들이 일백 년어치씩 무거워져 있습니다.  환풍기 한대 돌아가지 않는 밤의 아파트 광장, 그 고독에만 깃드는 광맥이 있어요. 빛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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