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글을 읽고 난 소회

2019.10.31 06:46

어디로갈까 조회 수:850

1. 상사의 공석으로 땜질해야 하는 일이 생겼어요. 급하게 읽어야 할 자료가 많아서 잠을 못잤습니다. 사실 저는 글을 굉장히 빨리 읽는 편이에요. 슥 훑어본 후, 요점은 포스트잇으로 표시해두고 주제어를 찾아둡니다. 그러고나서 되풀이하는 거죠. 
언젠가부터, 책도 처음부터 꼼꼼하게 읽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목차에서 마음이 가는 페이지 아무데나 펼쳐들고 보다가 관심이 가는 부분으로 빨려들면 앞뒤로 오락가락하며 읽어요. 마치 퍼즐맞추기처럼. 
그래서 소설보다 인문/사회과학 책들을 더 선호하게 된 것 같기도 해요.  문장 하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다른 견해를 지닌 책들을 찾아보며, 저자들끼리 토론시켜 보는 것도 중요한 재미입니다. 
단번에 해결되는 일은 없으므로, 한번 접한 후에 곁에 두고 반복해서 읽곤 합니다. 실은 빨리 읽는 게 아니라 오래, 느리게 읽는 방식인 셈이죠.

2. 자료 더미와 함께 몇 권의 책이 책상 위에 널려 있는 모양을 보자니, 문득 삶이 하찮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내용들이 서로 계통없이 부딪히는 탓입니다.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노라면 모든 방송이 한꺼번에 하찮아지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요. 개인들의 삶이 각자가 믿는 정당성으로 굴러가다가 서로 부딪히며 상처들을 내는 모양들을 볼 때도 그렇습니다. 삶이라는게 미몽처럼 하찮게 여겨져요.
그러니까 우습고 하찮은 것은 설명/주장들이 아니라, 집착이나 안간힘으로 살아내는 작은 삶들이 아니라, 어떤 부딪힘들이에요. 그 충돌의 두서없고 맥락없는 점이 하찮고 착잡합니다.

예전에 막내가 끄적인 낙서 중에 <사는 일을 하찮게 여겨지게 하는 것>이라는 제목이 붙은 글이 있었어요.
"웹 서핑을 하며 창을 여러 개 열어두었더니, 갖가지 음악들이 범벅이 되어 흐르고 있다. 기본으로 깔아 놓은 게 말러인데, A 사이트에선 유키 구라모토(인가?) 피아노 연주가 흘러 나온다. B 사이트에선 난데없는 휘파람소리에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라는 노래까지...  으하하. 난 귀가 예민한 편이어서 두 종류의 음악을 동시에 듣는 건 절대로 못하는데,  이렇게 범벅이 된 음악이란! 푸하.  허탈한 듯 기막힌 웃음을 만들어낸다. 그 웃음은 가슴 한가운데에서 진지하게 터져나오는 웃음이다. 이 느낌은 사는 일을 아주 하찮게 여겨지게 하는 것인데, 만난 지 꽤 오래된다.  반갑네. 하하."
위의 낙서를 보는데, '이 느낌은 사는 일을 아주 하찮게 여겨지게 하는 것'이라는 구절이 시선을 잡았죠. 딱 꼬집을 순 없지만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미지와 사운드로 범벅이 된 생활 환경에 대한 언급 자체는 새로울 게 없지만, 저 글의 몇 갈래 '웃음' 에서 어떤 '태도'가 읽혔어요.
1.으하하. 2. 푸하 - 허탈하고 기막힌 웃음. 3. 하하. 가슴 속에서 진지하게 터져나오는 웃음.  그것들의 소소하면서 날카로운 비평적, 성찰적, 방어적 뉘앙스에 대해 기억해 두고 싶었고요.

3. 지혜/지식은 설령 무용하게 여겨지는 것이라도  맑은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밝은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맑고, 밝다는 것은 <길>에 대한 전망이 있다는 뜻이죠. 벽처럼 끝나버리는 주장과 설명은 독자에게 아무 소용이 없어요. 토로에만 그치는 글은 부족합니다. 좋은 의미 혹은 기운을 보내려는 뜻(마음)이 있어야 해요.

글을 접할 때, 다 빼고 보는 것도 한 방법이죠. 현학과 장광설, 제스처를 빼고 핵심을 찾아야 합니다. 저는 글을 추동하는 것으로 존재하는 배후의 것을 보고자 애쓰는 편이에요.
그럼 스타일과 제스처는 언제 정당할까요? 그것은 의도되지 않고도 지속적으로 나타날 때 허용되는 차선의 진실입니다. 물론 모든 스타일리스트를 사기꾼, 스놉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적어도 자기염오와 피비린내 나는 자기부정의 싸움을 겪지 못한 스타일은 대개 스노비즘이고 사기이죠.  우리가 정당하지 않은 부를 누리는 자를 경원하거나 증오하듯이, 스타일이란 것도 역시 그와 같은 대상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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