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는 없구요) 대체로 평이 별로인 영화라 보고 싶지 않았는데, '알츠하이머에 걸린 살인자' 라는 소재가 관심을 끌어서 넷플릭스 목록 서핑할 때 계속 눈에 밟혔더랬죠. 근데 제 성격상 이렇게 거슬리는(?) 영화는 결국 언젠가는 보게된다는 걸 알기에 그 시기를 조금 앞당겨줬습니다.



 - 주인공 설경구씨는 연쇄살인범입니다. 정확히는 연쇄살인범이었던 사람이죠. 17년전 어떤 살인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자동차 사고를 당했고, 그 후로 좀 상태가 안 좋아져서 연쇄살인은 접고 그냥 본업인 수의사 일이나 열심히 하면서 홀로 예쁜 딸 설현찡을 키웠습니다. 뭐 직업은 농협 직원에 아빠를 지극하게 사랑하는 딸인 걸 보니 아주 잘 키웠죠. 수의사 일도 잘 하고 있었던 것 같고 여러모로 능력자인 설경구씨네요. 

 그러던 어느 날, 안개 속을 운전하다 앞서 가던 김남길씨의 차를 들이 받는 사고를 내게 되는데... 충격으로 열린 트렁크 안에 뭔가 피가 줄줄 흐르는 물건이 슬쩍 보이고, 연쇄살인범의 직감(?)으로 상대방도 연쇄살인범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최근들어 그 동네에서 젊은 여자들만 노리는 연쇄살인범이 활개를 치고 있었다는 거죠. 그렇다면 자신의 딸도 표적이 될 수 있으니 이 동종업계 라이벌을 어떻게든 처단을 해야 하는 것인데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 라이벌 놈의 직업이 경찰이라는 것. 또 하나는 설경구 본인이 알츠하이머 급속 진행 중이라 일상 생활 조차도 제대로 해내기가 어려운 상태라는 것. 하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우리 딸은 지켜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우리 경구찡의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김설현 구하기 작전이 시작됩니다...



 - 원작 소설에서 따온 것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소재가 나름 참신하죠. 그래서 도입부는 나름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젊은 연쇄살인범이 등장하자마자 뭔가 불길한 느낌이 솟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봐도 그냥 '한국형 영화 속 싸이코패스 연쇄 살인마 #78' 정도 되는 캐릭터일 뿐이거든요. (이 납작~하게 평면적인 느낌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조금도 좋아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설경구의 열연과 끊임 없는 반전들로 중반까지는 생각보다 잘 이끌어가다가... 막판에 말끔히 다 말아먹습니다.

 그냥 한국형 스릴러 영화들 고질병들을 그대로 답습해요. 클라이막스에 툭 튀어나와서 대책 없이 길게 이어지는 신파라든가. 별 재미도 긴장감도 없고 멋도 없는데 쓸 데 없이 시간만 잡아 먹는 1vs1 개싸움씬이라든가. 은근슬쩍 밥 말아 먹는 개연성이라든가. 필요 이상으로 길고 늘어지는 에필로그라든가... 내가 이 꼴을 보자고 소중한 내 인생의 한 시간 반을 투자했단 말인가!! 라며 반성하게 되는 20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뭐 더 길게 얘기할 것도 없이, 이 영화는 추천하지 않습니다.



 - 장점이 없진 않죠. 설경구가 그야말로 불꽃 연기(!?)를 보여줘서 지루함을 덜어주고, 김남길도 캐릭터의 무매력을 생각하면 그럭저럭 선방하는 가운데 설현도 딱히 어색한 느낌 없이 기대보단 잘 해줘요. 물론 예쁘구요 전체적으로 연기의 질은 딱히 흠잡을 데 없습니다.

 기술적으로도 나쁘지 않습니다. 대숲 장면들도 예쁘게 잘 찍었고 전체적으로 바닷가 시골 마을의 자연 경관을 멋지게 잘 잡아줘요. 때깔이 꽤 좋습니다.

 근데 어쨌거나... 이야기의 마무리가 아주 별로라서요. 아마 시간 좀 지나면 그냥 설경구의 연기만 기억에 남지 않을까 싶습니다.



 - 극장 개봉 후에 전혀 다른 엔딩을 담은 감독판을 공개했다고 하더군요. 호기심 해소 차원에서 그 결말을 검색해서 찾아봤는데... 뭐 지금 결말보단 한결 낫긴 한데 영화에 대한 평을 바꿀 정도는 아닐 것 같았습니다. 다만 좀 웃기는 게, 달라도 너무 다르더라구요. 그냥 아예 다른 이야기로 만들어 버리는 결말인데... 감독이 자기 이야기에 확신을 갖지 못해서 아예 두 가지 버전을 만들어 놓은 건지, 아님 확신은 있었으나 흥행이 잘 될 경우를 생각해서 서비스 차원으로 만들어 놓은 건지 궁금했습니다. 영화 완성도 상태를 보면 전자일 것 같... 

 스포일러 없이 간단히 설명하자면, 둘 중 하나는 영화를 신파로 만들고 다른 하나는 엔딩에 모든 것을 건 반전극으로 만듭니다. ㅋㅋㅋ


 개인적으론 감독판의 엔딩이 더 나은 것 같아요. 별다른 감흥이 없기는 마찬가지지만 이야기 속 떡밥들을 고려할 때 그 쪽이 더 이치에 맞고 합리적입니다. 게다가 이 영화의 신파가 제겐 전혀 먹히지를 않아서...

 


 - 알츠하이머라는 병의 특성상, 여러모로 '메멘토'를 떠올리게 만드는 장면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극한 위기 상황에서 갑자기 기억이 사라져 버리고 어버버하게 되는 장면들 같은 거요. 



 - 기껏 알츠하이머 같은 소재를 골라 놓고는 너무 얄팍하게만 써먹는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실제 알츠하이머 환자들이 겪는 고통들을 좀 더 디테일하게 묘사해 넣었다면 드라마도 강화되고 전체적으로 이야기가 좀 더 괜찮아졌을 것 같은데.



 - 저 위에서 김남길씨 캐릭터의 평면성에 대해 투덜거렸는데, 사실 감독판의 엔딩으로 간다면 그게 대충 납득이 되긴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캐릭터가 풍성해지고 영화가 재밌어지는 건 아니겠지만요.



 - 암튼 종합적으로 볼 때 뭔가 신선한 물건이 되려다 말고 주저 앉은 듯한 영화입니다. 원작 내용을 검색 해 보니 원작 그대로 갈 수 없었던 사정은 이해합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이 개작은 칭찬해줄 수가 없어요.



 - 설경구의 자동차 사고 장면이 반복될 때마다 이 뮤직비디오의 인트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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