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은 추억이 될 수 있는가

2019.09.19 20:51

Sonny 조회 수:2450

어제 화성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 특정되었다고 뉴스가 나오더군요. 조금 묘한 기분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흥미로웠습니다. 미스테리가 드디어 벗겨져나갔으니까요. 그는 누구인가.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그런 짓을 저지르고 지금까지 비밀스레 갇혀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건 감정적 공소시효가 지난 탓일지도 모릅니다. 너무 오래된 사건이니까요.

<살인의 추억>의 그 놈이 붙잡혔다고? 이 사건을 바라보는 제 의식의 첫번째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현실을 본질로 두는 게 아니라, 영화를 본질로 두고 현실은 영화의 전편과 속편처럼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Sns에서도 많은 분들이 그렇게들 인식하더군요. 여성이 살해당한 사건은 현실에서 아주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가 되어 또 다른 픽션으로 소비되고 있었습니다.

전에 어떤 블로그 이웃이 그러더군요. 모든 서사는 현실을 왜곡하거나 은폐한다고. 현실이 "이야기"로서 기승전결이 되는 순간, 그것은 소비자의 재미를 위해 복무합니다. 그런 점에서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이야기로 만든 <살인의 추억>의 위력을 다시 실감하게 됩니다. 저는 그 영화를 보면서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여성의 현실로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살인의 추억>은 남자들의 영화에 훨씬 더 가깝다고 느꼈으니까요. 남자들끼리 쫓고 쫓기는 가운데 여자들은 핏빛 병풍으로 세워져 있어요. 이 영화의 여자들은 오로지 희생자로서의 공포를 담은 자루로 꿈틀거립니다. 영화를 이끌고 가는 건 남자들의 탐구심과 무식함과 폭력과 마지막에야 간신히 나오는 분노입니다. 사실 그 분노도 희생자에 대한 분노라기보다는, 거짓말쟁이 약자에 대한 분노에 더 가깝죠. (용의자들을 두들겨 패던 송강호의 캐릭터가 김상경에게 서서히 전이되어가던걸 생각해보면요)

이 영화의 또 다른 강점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폭력으로 굴곡진 한국사를 작품에 녹여냈다는 게 이 영화의 성취일텐데, 그 지점에서 여성살해는 또 다른 주제를 위한 은유의 재료로 쓰입니다. 국가의 무관심 혹은 직접적 폭력에 희생당한 민중들... 여성의 시체, 여성의 살해 사실은 이 국가적 폭력을 직시하기 위한 프리즘이 될 수 있을까요. "저 여자들의 죽음은 국가에 의해 죽은 민중들이다"라는 공식이 과연 온당한 것인지 되묻게 됩니다. 여성의 죽음은 한 개인의 말살이면서, 여성이라는 성별을 가진 집단의 주된 피해일텐데 왜 이렇게 주가 되는 무엇을 위한 부로 쓰이고 마는 것일까요. 여성의 존재는 너무 쉽게 다른 주제에 종속됩니다. 감히 비교하거나 동일시될 수 없을만큼 마땅히 독립적인, 개별적 사건이자 한 계층의 역사적 학살로 분류되어야 하는데도요. 여성이 남성에게 계속 죽는 이 흐름은, 과연 비유의 재료만큼 가벼운 것일까요 혹은 탈부착이 가능한 것일까요.

솔직하게 묻게 됩니다. <살인의 추억>에 나오는 여자들의 얼굴이,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의 경각심을 가져다줬는지. 죽어서 개미가 기어다니던 그 얼굴과, 살아서 떨리는 목소리로 녹음을 하던 그 얼굴은 과연 우리 시대의 희생자를 온전히 비추고 있는지. 저는 그 표현의 진실성이 아니라, 기능의 진실성에 대해 묻고 싶은 것입니다. 스릴러의 "스릴"을 위한 과정이 아니라, 보는 사람에게 어떤 결론으로 남았던가요. 우리가 기억하는 이 영화의 결론은 두 남자의 얼굴입니다. 하나는 억울하고 두렵다는 듯 눈꼬리를 끝까지 치켜뜬 의심스러운 남자의 얼굴입니다. 또 하나는 말하지 않아도 이미 너무 유명한, 경멸과 무력감을 담은 얼굴입니다. 여자의 얼굴로 시작했던 영화는, 여자의 얼굴이 사라져버린 그 굴다리 아래를 비추고 다시 한번 남자의 얼굴을 비춥니다. 또 한번 비춰지는 남자의 얼굴에 담긴 그 허망함은 과연 여성희생자들을 향한 것인지 좀 궁금해집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 남자를 잡지 못한 남자의 회한"이라고 기억할 것 같거든요.

살인은 추억이 될 수 없음에도, 봉준호는 아주 멋지게 추억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실마저도 우리는 추억의 끄트머리에 붙여서 즐거워하거나 혀를 차며 금새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소거하고, 지극히 현실적으로 기억해야 할 것 같습니다. 30년전에 한 남자가 여러 여자를 강간하고 죽였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정체가 드러났습니다. 이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 사건의 전부이지 않을까요. 남자가 여자를 죽였다. 또. 그리고 잡혔다. 더 단순하게는, 이렇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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