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가 첫 번째로 제 눈에 띈 것은 동명의 서적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듀게에서 제목을 처음 봤는데, 실제 감독도 동명의 서적을 읽었을 뿐만 아니라 저자에게 허락도 받았더군요. 개봉 이후에도 제목의 연원을 물어보면 그 책을 꼭 말했나보더라구요. 그게 좀 호감이 되었어요. (본 저자도 오랫동안 잠수했던 트위터 계정을 살려  감사 아닌 감사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오프닝을 다큐멘터리 [모던 코리아] 팀에게 제작을 요청했다고 하더라구요. KBS 영상 아카이브를 모자이크처럼 편집해서 한국의 근대가 구성되는걸 근사하게 보여준 다큐멘터리 팀에게 손을 뻗다니, 기대가 더 되었습니다. 사회학 분야 서적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다큐멘터리가 아닌 영화에서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사회학적 요소들을 결합한다고 하니 기대를 늦출 수가 없었어요. 마지막으로 듀나님도 별점을 세 개 반이나 주셨더라구요. (오프닝이 흥미로웠던 분들은 [모던 코리아] 보세요, 두 번 보세요.)


그래서 이런 사회학 덕후(?) 영화가 있다니 하고 영화관에 갔는데, 올 해 본 것 중에 관에 사람이 가장 그득그득해서 깜짝 놀랐어요. 아니 다들 이렇게 사회학에 관심이 많았나? 싶은 이상한 착각도 했죠. (개봉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본 이유는 모르겠어요) 그리고 영화를 계속 보면서도 '아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볼 영화인가? 사람들에게 무슨 영화를 보여주는(?)거야?' 싶었어요.


영화 내용은 생각보다 단순합니다. 예고편에 나온대로, 서울에 모종의 거대한 지각변동 재난이 왔는데 아파트 한 단지만 살아 남아요. 주인공들은 그 아파트에 살던 한 부부고, 이병헌은 어쩌다 뽑힌 아파트 대표입니다. 각박한 재난살이에 외부자들을 몰아내고 아파트 주민끼리 잘 살아보기 위한 여러 선택들의 연속이죠. 그리고 여기에 대한 해석들은 굉장히 많은 분들이 써주셨으니까 하나 더 얹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다 보고나서 저는, 완성도가 아주 높다고는 할 순 없지만 신파도 최대한으로 줄였고 군더더기도 크게 없었던 나쁘지 않은 영화다, 라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함께 본 애인이 아주 깊게 분노해서 한참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어요. 


저 - 이 영화가 이렇게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지도 모르겠고, 앞으로 그렇게까지 흥행할 지 모르겠다.

애 - 사람들은 이병헌에 감정 이입하고, 가부장으로 고생한 남자들한테 이입할 것이다. 영화가 그렇게 나왔다. 그런고로 그런 의미로 흥행할 것이다.

저 - 아니, 대놓고 '암탉이 울면 어쩌고' 하면서 비꼬고, 총체적인 내용이 비꼬는 내용에, 마지막에 우물안 개구리 식으로 해설되지 않는가?

애 -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박보영은 그저 민폐 캐릭터일 뿐이고, 하는 것 없이 안전한 공간에서 얻어먹기만 하다 이상론을 펼치는 식으로 이해될 것이다.


애인은 박보영이 다른 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주어지지 않은 것에 상당한 답답함을 느꼈나 보더군요. 다시 생각해보면 영화상 원천적으로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단일 통로가 제시되었어요. 심지어 내부고발자는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고요. 개연성이 여성들을 오도가도 못하게 막은 시나리오였던 거죠. 이후 [하트 오브 스톤]을 보고 마음을 풀었습니다만 (이 영화가 별점 두 개 밖에 안 된다고 생각되지는 않더군요) 여러모로 생각이 들더라구요.


이후 여기 저기의 평을 읽어봤는데, 애인의 말 대로였습니다. 이동진마저 이병헌의 신들린 연기를 칭찬하더군요. 대부분 이병헌이 영화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고, 이병헌의 죽음에서 영화를 잘랐어야 된다고 생각하더라구요. 뒤는 군더더기며, 심지어는 외부자를 숨겨준 사람들에게 죄송하다는 말 200번으로는 부족하고 목매달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봤습니다. 재난은 이미 와 있으며, 하루 하루의 삶이 딱히 그 아파트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제게는 상당히 섬뜩한 주장이었죠.


개인적으로 황궁 아파트 바깥에서도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상황에서, 외부와의 외교와 내부의 정치가 비틀어졌기 때문에 일어난 파국이라고 생각했고, 여주인공의 진실 토로는 그 파국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어요. 주변 이웃들에게 업보를 한껏 쌓았기에 습격과 매복을 당하고, 결국 통치에 불만을 가진 내부자로 인해 외부로의 벽도 무너졌죠. 하지만 그런 상황들은 잘 보이지 않았나봅니다. 그래서 이 영화 자체보다는 이 영화의 여러 주류 해석들이 더 흥미로운 영화가 되었습니다.


궁금한 점을 몇 가지 뽑아 보면....


도균(검은 테 안경 주민)의 죽음 이후 그의 시체를 태운 직후 물이 터집니다. 이 맥락은 무엇인지, 라고 쓰고 나서 이런 저런 읽었던 글을 떠올려보니 모세로 인해 반석의 샘물이 터진 성경 내용이 떠오르는군요. 그렇게까지 노골적인 성경 인용인가 싶긴 하지만.


이병헌이 결국 박지후(문예원)를 절벽에 던져 버리고 (심지어 화장실 쓰레기를 버리던 곳에) 아무도 그걸 저지하지 못 하는데... 꼭 이렇게 했어야 했나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박지후는 그저 또다른 냉장고에 들어간 여성 캐릭터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인지.


마지막에 결국 김민성은 죽고 명화만이 여성 공동체에 도착하게 됩니다. 역시나 굳이 민서준을 죽였어야 되었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데, 어떤 합당한 결과로 인한 건지 그런 부분도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가는 길에 아래서 올려다보는 사람 씬은 왜 넣었을까요.)


여러 장면에서 나온 바둑돌들은 딱히 궁금하진 않고. 애인 말에 따르면 처음 이름 적을 때 ㅁ부터 적는건 자기 이름이 아니어서 그랬다는 디테일이 있다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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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것보다 정말 망해버린 세상에서의 아찔함이 리얼하게 느껴지는 영화였습니다. 특히 자식 없는 부부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경우는 거의 처음 봐서 더 이입되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원작 웹툰도 봤었는데 그 웹툰은 딱히 바랄만한 것도 없었던 음울한 내용 위주었습니다. 드라마 [해피니스]와도 겹쳐서 비교되는 부분들이 몇몇 떠오르긴 하지만 이 영화를 그렇게까지 복잡하게 봐야 하는 건가 싶은 의구심도 있어 이 정도만 느낀점을 써봅니다. 휴, 이제 듀게 다른 분들의 글을 자세히 읽어봐야겠습니다.


아, 그리고 ... 영화에서 기묘한 고어 분산 및 편차의 이질감을 느꼈는데요. 뭐라고 해야 할까, 요즘 영화들이 끝없이 잔인해지는 판국인데, 이 영화에서는 정말 잔인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을 때는 딱히 일어나지 않고, 그렇지 않은 부분에선 상당히 묘사가 잔인하고 해서 독특했습니다. 시체들이 이렇게 많이 나오는 영화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반면에 인간을 상해하거나 괴롭히는 부분은 특정 장면 빼고는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걸 안 보이게 하는게 아니라 그냥 안 나옴) 그런게 꽤 특이하게 다가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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