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이야기] 숙모님과 개

2011.02.10 19:12

그냥저냥 조회 수:3769

먼저 살았던 동네에는 막내삼촌내외분의 슈퍼마켓이 있습니다. 가게까지  제가  살던 집에서 길을 따라 2~3분 거리였어요. 

개를 산책하고 돌아오는 길에 가끔 가게에 들러 음료수 한 개씩을 얻어먹는 재미가 있었어요. 나이대가 비슷한 숙모님과의 수다도 즐거웠구요. 

가게에 들를 적마다 숙모님은 개에게 소세지를 하나씩 주시곤 했어요.  조카가 데리고 오는 개도 세심하게 챙겨주시는 분이시거든요.

'유쾌하고 인정 많고 너그러운 성격'을 현실화 시키면 바로 이 분일듯 싶을 정도. 제가 무척 좋아하는 집안 어른이십니다.  

개도 숙모님을 무척 좋아했어요. 숙모님을 좋아하는지, 아니면 숙모님이 주시는 소세지를 좋아하는지는 헷갈리는 부분이나. 어쨌든 좋아했습니다. 


한 번은 살짝 열린 현관문으로 개가 빠져나갔습니다.  다행히도 개 꼬리가 현관문 밖으로 유유히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고 바로 미친 듯이 쫓아갔습니다. 

"야이!  삐리리리한 개삐리리리! 너 거기 안 서! 너 잡히면 오늘 저녁에 잡아먹을껴! 거기서!" 라고 애절하게 부르는 주인님을 외면한 이놈의 개.

개는 뒤도 안 돌아보고 광속도로 전력질주를 해서는 슈퍼마켓으로 쏙~ 들어가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가게 의자에 앉아계시던 숙모님 무릎을 두 발로 짚고 서서는 꼬리를 힘차게 흔들며.

"나 왔어요. 나 왔어요.  반가워요. 너무 보고 싶었어요. 오늘도 소세지 줄거죠? 소세지 어딨어요? 소세지 주세요"

라는 눈빛 공격을 하고 있더군요. 

숙모님은 갑자기 뛰어들어온 개를 보고 놀라셨지만, 뒤를 쫓아온 제 행색을 보고는 혀를 끌끌차셨습니다. 

"어머! 온 동네에 쩌렁쩌렁하게 욕을 하면서 뛰어다니면 어떡해. 챙피하게시리"


개를 옆구리에 끼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속에서 짜증이 확하고 올라오면서 어이가 양쪽 귀로 쉬익하고 빠져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흘러내리는 운동복 바지를 부여잡고 쫓아오느라 머리는 바람에 산발이 된 주인 몰골은 딱 '광년이'. 아.. 챙피하기 그지없건만,

개는 숙모님한테 토닥토닥도 받고 부비부비도 하고 결정적으로 소세지도 얻어서 기분이 매우 업~! 되었습니다.

제 옆구리에 찡겨서도 꼬리는 흥에 겨워 살랑거리고, 너무 신이 나 콧바람에 흥흥거립니다. 


이날의 일은 다시 생각해도 울컥하고 어이가 없어집니다. 이런 바보 개를 봤나!

제 반려견이 차도개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개가 도도한 성격이었다면 좋아하는 사람을 향해 미친 듯이 뛰어가지 않을테고, 주인이 '광년이 모드'로 변신해서 개를 쫓아 뛰는 일도 없겠죠.

불가능한 바람이이에요.ㅠ.ㅠ


참 개는 지금도 여전히 숙모님을 좋아해서, 가끔씩 숙모님이 놀러오시는 날에는 밤새도록  숙모님 옆에서 불침번을 섭니다. 

숙모님은 아침이면 뚱그런 눈으로 자신을 빤히 지켜보는 개때문에 깜짝 놀라서 깨시지만.. 개는 그런 사소한 문제는 신경을 안 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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