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만나기 두시간 전

2019.09.28 11:50

어디로갈까 조회 수:821

(제목은 낚시질입니다. 해죽~ 아시는 분은 알고 모르시는 분은 모를 사제인 친구가 상경할 일이 있어서 늦은 점심 약속이 잡혀 있습니다. 약속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은 한눈 파는 짓을 못하는 성향이라 듀게에 문질문질~ - -)

........


저에게 공간의 의미를 처음으로 가르친 건 뮌헨의 <성모교회>입니다. 열살 무렵 겨울, 그곳에서 노래로 행하는 저녁기도(Vesper)를 들은 적이 있어요. <그리고 천사가 그녀에게 말하길 und der Engel sprach zu ihm...>이라는 구절이 반복되는 노래였습니다. 아마도 천사가 마리아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는 성탄 오라토리오였던 것 같아요. 천사들의 파트를 맡은 성가대원들은 제 뒷쪽 높은 곳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그 소리는 우주를 한 바퀴 돌아오는 듯 아련하고 신비로웠습니다. 


아득히 먼 곳이면서 동시에 듣는 이의 내면에 스며드는 듯 가깝고 선명한 느낌이 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지금도 건축과 음향학의 문외한이지만, 그때 어린 저는 '아, 저런 소리와 저런 감동의 울림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성당은 이만한 공간을 필요로 하는 거구나' 라고 느꼈더랬습니다. 울림이 성립되는 건 그러므로 '거리'에 의한 것이죠. 거기에서 비로소 세계의 크기가 생겨납니다. 


천사들의 노래가 시공을 가로질러와 우리에게 닿습니다. 그 노래가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속삭여요. 모든 사람들이 언제나 듣고 싶어하는 말일 테죠.  그러니까 듣고 싶은 말일수록 우선 높이와 층계를 통한 '거리'가 있어야만 합니다. 간절한 아름다움은 그 거리를 통해서만 생겨날 수 있는 거라는 생각. 그러므로 아름다움은 '격절 隔絶'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 때문에 저는 이미 몇 번쯤 무릎을 꿇었던 것 같아요. 

그러고는 무릎을 문지르며 일어나 다시 일어서는 기도를 바치곤 했을 겁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거리가 있기에 아득한 아름다움이 서서히 다가온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 덕택에 아득한 거리가 생겨나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왜냐하면 '두려워하지 말라'는 아름다운 노래가 아니었다면, 저는 그것과의 거리나 공간 따위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Inside-Frauenkirche.jpg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32037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51023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61336
110006 오늘의 요정 핑크 (스압) [5] 파워오브스누피커피 2019.10.08 646
110005 새 날 [2] 칼리토 2019.10.08 526
110004 새벽의 불안 [17] 어디로갈까 2019.10.08 1071
110003 조커를 봤는데.. 기억에 남는건 와킨 피닉스 얼굴 뿐이네요. [1] 보들이 2019.10.08 1096
110002 “웃기고 앉았네... 병X같은게” [20] ssoboo 2019.10.07 2269
110001 국정감사를 빛낸 민주당의 살아있는 양심 [3] 타락씨 2019.10.07 1129
110000 진지한 질문) 혹시 라오스 에 대해 잘 아시는 분께 문의드려요 연금술사 2019.10.07 459
109999 [EBS1 다큐프라임] 송광 [채널CGV영화] 매혹당한 사람들 [1] underground 2019.10.07 619
109998 [넷플] 모털 엔진 (노스포) [14] 가라 2019.10.07 768
109997 클린트 이스트우드 ‘리차드 주웰’ 예고편 [2] skelington 2019.10.07 608
109996 스포일러] 승계 (Succession) - HBO [3] 겨자 2019.10.07 1088
109995 요즘 본 영화들에 대한 짧은 잡담... [2] 조성용 2019.10.07 8480
109994 [넷플릭스바낭] 스티븐 킹 원작, 존 카펜터 감독의 '크리스틴'을 봤어요 [8] 로이배티 2019.10.07 775
109993 자기 돼지 살리려 모든 돼지 죽일뻔한 동물단체 [2] 사팍 2019.10.07 1054
109992 재벌가 자제들이 마약상들 옥살이 도와준다 [2] mindystclaire 2019.10.07 890
109991 오늘의 명화 [1] 파워오브스누피커피 2019.10.07 366
109990 철수형 한국 안온다는군요. [5] 가라 2019.10.07 1321
109989 이런저런 일기...(월요일, 실속, 허세) [1] 안유미 2019.10.07 430
109988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본 영화들. 부산 후기 [5] N.D. 2019.10.07 710
109987 로그원 : 스타워즈 스토리를 봤습니다. [2] 칼리토 2019.10.06 637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