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푸르나에 갔었죠

2019.09.21 09:41

어디로갈까 조회 수:1022

대학원 1학기를 다니다 접던 해 가을, 안나푸르나에 갔습니다.
제 102 번째 애인이 갑자기 저 세상으로 떠나버린 후, 한 세월을 접은 듯 소리 없이 눈금도 없이 시간이 흘러가던 시절이었어요. 
낯선 고장에서 과거와 단절된 채 사는 사람처럼 저는 배경 없는 시간 속에 있었습니다. 이상한 진공상태였어요. 
아침에 눈을 뜨면 시간은 멈추는 게 아니구나 하는 희미한 무력감이 스쳤고, 가방을 꾸려 어딘가로 떠나야 할 것만 같은 난감한 초조함이 찾아오곤 했습니다. 한없이 먼 곳, 시선 둘 곳이 절실하던 날들이었죠. 
그래서 저는 떠났습니다. 시간이 무한히 펼쳐져 있는 공간을 향해. 거대한 것과 충돌하여 산산이 부서지기 위하여.

안나푸르나는 제 감각을 넘어서는 주제였습니다. 장엄함과 숭고함은 번역해낼 수 없는 무엇이죠. 
그것은 상상하지 못한 걸 체험할 때의 느낌이므로 기존의 경험으로는 번역 불가능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시간이 흘러봐야 익숙해지지도 않아요. 그것은 영원한 낯섦입니다.
15박 16일의 트레킹. 돌아와서 저는 한 줄의 여행기도 쓰지 못했어요. 
눈을 적신 풍경들이 마음 속에서만 떠올랐다 가라앉을 뿐, 언어로 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몇 달 후에, 우연히 산악인 지현옥 일행의 히말라야 등정을 기록한 테입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영상을 본 날, 잠들지 못하고 저는 지현옥 씨에게 한 장의 편지를 써서 제 비밀상자 속에 보관했습니다. 
그 짧은 편지가  안나푸르나에 대한 제 회상의 전부예요.
 
- 지현옥 님에게

조금 전, 당신의 '안나푸르나' 등정을 기록한 비디오 테입을 봤습니다.
단순히 육체적 시도가 아닌, 전 생애를 미지로 옮기는 진중한 걸음의 기록은 제 마음 속에 저장되어 있던 기억을 모두 지워버리는 힘을 발휘했습니다. 
베이스 캠프까지는 저도 올랐었는데, 가보지 않은 곳인 듯 도무지 기억이 하얗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광대하고 장엄한 자연은 인간이 설명할 수도 없고, 굳이 누군가에게 증명해야 할 이유도 없는 것이죠.
망각이 오히려 견고하고 순결한 기억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는 동안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을 경험하기 이전과 이후의 삶이 달라지는 혁명으로서의 경험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이 저에겐 그런 경계를 긋는 경험이었습니다.
그 하염없이 고요하던 세상에서, 제가 인간임을 각성하는 가장 아름다운 체념에 도달해 봤으니까요.

등반 전, 베이스캠프에서의 인터뷰에서 당신이 남긴 말이 여태도 제 마음에 깊은 울림을 만들고 있습니다.
"산에서 내가 배운 하나는 자신을 낮추는 법이고
 산이 내게 가르친 건 단 하나, 비정함이다."

그러고 더 오를 곳이 없는 지점에서 당신은 홀연히 사라져버렸습니다.
죽음과 닿아 있음이 자명한 실종이지만, 그걸 죽음이라 부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이 땅으로 돌아오지 못한 게 아니라, 안나푸르나에 영원히 남았을 뿐인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나요?)
       
저의 가이드를 맡았던 사람은 덴이라고 불리는 청년이었어요. 아킬레스건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삶이나 세상에서 아무런 상처도 받지 않고, 길가의 돌멩이나 나무 의자처럼 피흘리지 않고 조용히 마모되어갈 것 같은 사람이었죠.

트레킹을 시작할 때 그가 제게 말하더군요.
"안나푸르나는 그 고도(altitude)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안나푸르나를 대하는 당신의 태도(attitude)가 중요합니다."

사는 동안 제 삶의 지표가 되어 줄 이 명징한 철학.
모든 산은 결국 각자의 높이를 오르는 것이고, 그건 우리 삶의 등고선에도 적용되는 진리일 것입니다.                         
언제든 당신이 이런 엽서 한 장 보내주시면 참 기쁘겠습니다. 지.현.옥이라고 또렷하게 서명을 해서요.

'고도와 태도의 구분을 넘어 산은 여전히 나의 실존입니다.
내 목숨을 안나푸르나에게 주었다 해도, 내가 산에게 준 것보다 산으로부터 내가 받은 것이 더 많고, 더 큽니다.
그 감동으로 아직 나는 안나푸르나에 행복하게 머물고 있습니다.'

덧: 안나푸르나 트레킹 후 네팔 소년/소녀 세 명을 개인후원하고 있습니다.
그중 한 소년이(이젠 청년이네요) 얼마전 Diploma 학위를 받았는데 한국에 와서 일하고 싶어해요.
제가 뭘 도와줄 수 있는지 알아보는 중인데 어젯밤 보낸 그의 가족 사진에 눈물이 터지고 말았어요. 
어머니가 앞을 못 보시는데, 제 이름을 쓴 감사 카드를 만들어 들고 계셨....

Annapurna-Lake.jpg


(제가 올리는 사진이 뜨나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32381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51427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61752
109968 슈퍼스타k 광고 .. [15] 칭칭 2010.09.25 3759
109967 회 좋아하십니까? [29] 푸른새벽 2010.09.06 3759
109966 요새 읽고 있는 책들에 대한 짧은 글 [12] 낭랑 2010.08.04 3759
109965 [공복에바낭] 건강검진, 담배/술값 아끼기, 어깨 굳었을때 좋은 방법? [10] 가라 2010.07.13 3759
109964 방자전 (스포일러) [2] 노을 2010.06.15 3759
109963 고양이를 개보다 더 좋아하는 이유 [11] 루아™ 2014.08.10 3758
109962 '위암 투병' 유채영, 오늘(24일) 오전 별세 [37] forritz 2014.07.24 3758
109961 오늘 하루종일 화제가 된 사건 [7] 메피스토 2015.07.15 3758
109960 요즘 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연예인 마약 단속 하는 거요. [10] Muyeong 2013.03.13 3758
109959 악당들을 마구 도륙한 뒤 포부당당하게 걸어오는 힛걸 [10] zzz 2012.09.01 3758
109958 왜 이렇게 이문열이 불편할까요. [19] 교집합 2012.08.10 3758
109957 후궁감상 (스포 결정적인 거 하나 있음) [6] 올리비에 2012.06.10 3758
109956 [바낭] 마이너의 뿌듯함 [29] 이인 2012.05.12 3758
109955 아직도 여자친구가 없다구요?? [9] 닥터슬럼프 2012.02.08 3758
109954 (스포) 하이킥 다음 커플 너무 충격적이네요 ㅠ.ㅠ [12] Keywest 2011.11.02 3758
109953 韓 부도위험 급격히 악화…`위기국가' 프랑스 추월 [6] 얼룩송아지 2011.09.25 3758
109952 주인공이 서서히 미쳐가는 내용의 소설/ 영화 추천 받아요 [37] 도니다코 2011.08.11 3758
109951 번역서에서 발견했던 오역 중 가장 재미있는 사례 [14] amenic 2011.04.04 3758
109950 앤 해서웨이 신작 [One Day] 포스터 [14] 보쿠리코 2011.02.15 3758
109949 소녀 소설들 [25] august 2010.10.28 3758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