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분의 리퀘스트로 씁니다.
얼마전 조말생이나 황희가 사직서를 제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라는 기사가 재미있는 자료로 돌더군요.
...뭐 황희는 끝내 일을 그만두는데 성공하고 집에서 죽었지만.


농담삼아 세종 시대의 신하들은 월화수목금금금으로 시달렸다고 이야긴하지만. 말이 그렇지 어디 그리 편안했겠습니까. 집에 가지도 못하고 일만 하면 얼마나 힘든데요.

옛날 위인전에서 이런 이야기 읽은 기억이 있는 분들 꽤 될 겁니다.
집현전의 젊은 학자 신숙주가 밤새 글을 읽고 있는데, 세종이 그걸 보고 지켜보다가 신숙주가 잠든 이후 담비 가죽 옷을 가져다 덮어줬다는 말이지요. 보통 이 이야기는 세종이 신하들을 그렇게 아꼈다, 라는 내용으로 전해지지만 야근을 해본 사람은 이 이야기가 공포로 느껴질 거여요.
말 그대로 언제나 지켜보고 있다... 라는 싸인을 남긴 것이니 이 어찌 무섭지 않겠어요. 게다가 다른 신하들보다 임금님이 더 오래 깨어있다는 것이니...

 

사실 세종은 꽤 오래 다스렸고, 그래서 대단히 많은 신하들을 두고 있었습니다. 가장 유명한 신하들... 황희나 장영실, 김종서, 정인지 등등은 몇 가지 에피소드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신하들이 있었고 또 신나고 즐겁게(?) 부려먹혔습니다.
이렇게 일 시키는 데 딱히 기준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남들보다 잘하는 재주 하나만 있으면 되었습니다. 황희나 김종서 등등 유명한 신하들 이야기야 꽤 유명하니, 이번엔 좀 덜 알려진 b급 신하들의 사례 몇 개만 모아봤습니다.

 

신하 케이스 1 : 노한(盧閈)
신하 : "임금님, 어머니가 여든 넘으시니 아프셔서 일 그만해야 겠어요."
세종 : "너 아니면 누가 중국인 사신을 접대하니. 파트타임 하렴."
-> 낮에는 사신들을 접대하고 저녁엔 어머니 간호.

 

신하 케이스 2 : 김돈(金墩)

신하 : "임금님, 어머니가 전라도 강진 시골에서 혼자 사세요. 저 외근 나가게 해주세요 ㅠㅠ"
세종 : "너 아니면 누가 간의대 만들겠냐... 잠깐 기다려."
- > 우등 고속 역말을 내주어 어머니를 서울로 모시고 오게 함. 어머니도 봉양하고 일도 하고 해피해피 ^^

 

신하 케이스 3 : 김하(金何)

종실 : "임금님, 김하란 녀석이 제가 사귀는 기생이랑 논대요! 혼내주세요!"
세종 : "넌 있건 없건 나라에 별 상관없지만 걔는 중국어 잘 하니까 나라에 꼭 필요해. 너 또 그러면 혼난다?"
- > 임금의 명으로 기생을 첩으로 내림. 김하는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도승지가 찾아와서 사정을 전하자 깜짝 놀라며 머쓱해했다는 뒷이야기도 있고요. 이후 상중에 그 기생을 찾아가서 탄핵받지만 임금님이 감싸주기까지 합니다.

 

뭐 이런 식이었습니다.
특히 김하는 사고를 치니까 신하들이 사퇴시키라고 벌떼같이 조르곤 했습니다. "임금님, 걔가 중국어 통역 잘 해서 재주 아끼는 건 알겠는데 저지른 짓 좀 너무하잖아요?" 그렇지만 세종은 알았어, 알았어 하면서 대충 넘어가버립니다. 이렇게 보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박연은 뒷돈 받아 챙기기도 했고 황희나 그런 사람들도 스캔들이 있긴 했는데 세종이 감싸줘서 그냥 넘어간 것들이 많으니까요.

 

꼼꼼하신 세종 마마께서는 좀더 잘 쥐어짜서 부려먹기 위해 노예들... 아니, 신하들의 건강도 챙기셨습니다. 특히, 술! 왜 들 그리 술을 많이 퍼마셨는지 모릅니다. 그러다 일찍 죽은 사람이 참 많았죠. 윤회도 그렇고 김문도 그렇고. 또 한 사람 더 있는데 최치운이라고 합니다. 이 세 사람은 하도 술을 마시니까 임금님이 작작 좀 퍼마시라고 각개야단을 쳤습니다.
윤회는 은잔 하나 내리면서 이걸로 딱 세 잔 마셔라, 라고 했더니 그걸 두들겨 세숫대야로 만들어 드링킹을 해대서 세종이 내가 더 주량을 늘렸다고 한탄을 하기도 했죠.
다른 한 사람 최치운은 임금이 친히 술 그만 마시라는 편지를 써서 보내니 그걸 집 벽에 붙여놓고 술 마시고 들어오면 그 편지에 대고 머리를 조아리며 "임금님 지송염"이라고 했다던가요. 해서 그 사람 부인은 남편 머리를 잡고 임금의 편지 쪽으로 갖다 놓았다고... 그렇지만 결국 술 못 끊고 40살에 죽었다더군요.
왜들 그리 술을 마셨을까요. 업무 상의 스트레스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지나친 상상이려나요.

 

그 외에 갑자기 이름이 기억이 안 나는데, 천민 출신이었다가 풍수지리에 재주가 있어서 신분이 양인으로 업 된 사람도 있었습니다. 장영실 아니고요, 그런 사람이 몇 더 있었다는 거죠.

 

이처럼 세종의 시대, 유명한 사람보다 알려지진 않았지만 많은 이들이 저 나름의 소질을 가지고 자기 맡은 분야에서 종사했지요. 여기 예로 들어진 사람 중에서 처음 들어본 신하들도 있을거여요. 그런데도 세종의 사랑(?)은 공평하고 꼼꼼하게 널리 퍼졌습니다. 이게 신하들로서는 이게 과연 행복이었을지 불행이었을지?


가장 부려먹인 대상은 웬지 집현전이라는 편견이 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아침 일찍 출근해서 저녁 늦게 해가 떨어진 다음에야 퇴근하는 것으로 이름난 곳이었으니까요.
세종은 집현전을 무척 아껴서 과거에서 우등 성적을 차지한 인재들을 주르륵 집현전으로 발령하는가 하면, 각종 먹을 것도 내려주고 혜택을 내리는 등 많은 총애를 했습니다.
대우는 꽤 좋았습니다. 그 귀하디 귀한 귤을 내려주는 때도 있었으니까요.
뭐 이거야 최고급 음식과 안락한 숙소를 제공하면서 하루에 16시간 근무, 였을지도요.

 

그렇게 해서 뽑아져 나온 결과물이란, 의학(의방유취), 언어학(동국정운, 훈민정음, 용비어천가), 역사학(고려사, 자치통감), 음악, 달력(칠정산), 농사직설(농법), 지리(세종실록지리지) 예식(예악지) 등등. 게다가 책을 짓는 것 뿐만이 아니라 주석, 곧 해설서를 만들기도 했으니 대표적인 것으로 당시의 강력사건 기록인 무원록이 있습니다. 책만 따진 겁니다. 다른 거 따지면 너무 힘들어서...

 

이렇게 몇 줄로 간단하게 말하니 임팩트가 없지만 이것들은 정말 어마어마한 업적입니다. 사실 맘 잡고 책 한 권 읽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이런 건당 수백 권이 넘어가는 전집들을 쑴풍쑴풍 찍어냈으니 말입니다. 기획하지요, 자료 모으죠, 편집하지요, 검토하지요, 그러다 쌈박질 좀 하지요, 정리하지요, 책으로 만들지요... 어, 거기에 이걸 찍어내기 위해 활자까지 새로 만들었지요.
사실 세종이 꽤 오래 다스리긴 했지만 그래도 이만한 퀄리티의 분량을 고작 30여년 만에 뽑아낸 걸 보면 당시 신하들이 얼마나 죽도록 일했는지 대충 견적이 나옵니다.
지금도 조선시대 때 지명이라던가 지역 특산물, 예식 등의 자료를 찾아보려면 세종실록을 1차로 봐야 한다는 걸 생각하면 역사학도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사료의 가나안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세종 시대 신하들은 모두 토끼눈에 과로사 직전이었을 거 같지만, 그렇다 해도 다양한 케이스가 있었으니, 대낮출근에 해 지면 칼퇴근인 신하도 있었습니다.

"님하, 왜 늦게 출근했다가 일찍 들어가심?"

이렇게 정승 허조가 퉁박을 놓을 정도였지요. 그야, 이 신하(이름은 신상)는 순발력이 있어 일이 들어오면 그 때 그 때 처리하는 재주가 있었던 인물이라서요. 나름 탄력 근무제가 가능했던 것이니 각자 자기 재주 별로 알아서 일 하면 되었나 봅니다.

 

이렇게 적으면 세종이 신하들을 달달 볶기만 한 임금 같지만, 사실 웬만한 신하보다도 더 열심히 일을 한 임금이었으니 뭐라 하긴 어렵죠. 이 많은 신하들의 사정을 다 꿰고 좋은 근무환경 만들어주려고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고, 그 졸라 재미없는 자치통감 편집본을 읽어보며(경험담) "책 읽으니까 잠이 깨네!" 하며 좋아했으니 뭘 더 바라겠어요. 이토록 일 좋아하고 공부 좋아하는 임금님이었으니까 걍 죽은 척 하고 일해야 했겠죠.

 이로서 해피엔딩, 해피엔딩.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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