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달기의 어려움

2019.09.13 18:21

어디로갈까 조회 수:1088


1. 아버지 노트북을 빌려서 청축키를 오랜만에 즐기며 몇자 써봅니다. 명절이 뭐라고 이런 날엔 이런저런 감상이 증폭돼서 여과없이 막 기록해두는 버릇이 있어요. 저는 이런 글쓰기를 '자판적 상상력의 글쓰기'라 칭하는데 더구나 세벌식 자판을 사용하니 더 그렇습니다. 뇌의 전두엽과 자판의 싱크가 발생하는 상태를 느낀달까요, 생각의 속도와 글쓰기의 속도가 일치하는 짜릿함이 있어요. 평소 게시판 글쓰기는 제 경우 '뼈만 쓰라'는 드라이한 자기검열이 작동하는 측면이 있거든요. (잘 지켜지진 않지만. - -)

저는 온라인 게시판에서의 나이브한 글쓰기를 옹호하는 편이에요. 나이브하게 느낌을 음미하기, 느낌을 언어로 스크래치하지 말기, 그저 내버려두기, 느낌/생각과 언어를 모험의 터치 속에 함몰시켜보기, 거기에서 일렁이는 잔물결과 윤슬에 그대로 편승하기 쪽에 손을 들어줍니다. 뭐 가끔 이런 건 퍼포먼스에 불과하구나, 누구에게도 곁을 내주지 않는 싸움걸기구나 싶은 글이 게시판에 뜨기도 하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

2. 명절이면 집마다 흔히 있기 마련인 정치권 이슈에 대한 수다가 우리집 점심 식탁에서도 반주 역할을 했습니다. 입 닫고 청주나 홀짝이고 있었더니 아버지가 굳이 '한말씀 피력'을 요구하며 마이크를 대셨죠. 
- 요즘 한국은 '꽃 피고 싶은 놈 꽃 피고, 잎 달고 싶은 놈 잎 달고, 반짝이고 싶은 놈은 반짝이고, 아지랭이고 싶은 놈은 아지랭이가 되는'세계라는 걸 새삼 확인하는 중이에요.
"오, 멋진 표현인데?"
- 아부지~ 제 말이 아니라 오규원 시인이 제가 세살 때 썼던 싯구예요. 더 스타일리쉬하게는 횔덜린이 <가니메트>에서 쓴 "모두들 각자 자기 방식으로 피어난다"라는 구절이 있사옵니다~.
"(흠칫) 그러냐?"
- 평론들은 <봄>의 자유를 그린 시라던데 저는 꽃피는 지옥을 노래했다고 느꼈어요. 지옥이라고 해서 필 꽃이 안 피고, 반짝일 게 안 반짝이겠나요. 자, 자유니 다들 마음대로 피어보죠 뭐~  
"꽃피는 지옥이 무슨 뜻이냐?"
- 무정부상태에 가까운 아노미 상태 같은 거죠. 한국의 집단주의는 특히 아노미 상태를 견디기 힘들 거에요. 이 땅에서 개별자란 항상 튀는 존재로 인지되고 계속해서 갈등을 만드는 존재일 뿐이죠. 아니에요?
"(어머니에게) 여보 쟤 술 더 주지 말아요~"

3. 멀리 떨어져서야 제대로 관계를 정립할 수 있는 그런 대상이 있습니다. 사람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데, 그 향이 강할 경우 그런 것 같아요.
좀전에 아물거리는 눈을 비비며 인터넷신문을 뒤적이다가 아는 얼굴들이 우수수한 단체사진을 봤습니다. 그 속에 제 은사님이 무릎을 구부려 안은 자세로 앉아 계시더군요. 모 처에서 투쟁 중인 모습이었어요. 강의실은 물론 축제마당이나 술자리에서도 과묵한 분이었고 우리들 사이에선 침묵의 아이콘이었죠.
학창시절, 저는 그가 누구보다 한 권의 책을 더 쓰려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요즘 생각해보면, 선생님은 책을 쓸 필요가 있나, 라는 마음을 다소 지치고 지루하다는 표정에 담아 서 계셨던 것 같습니다. 저는 어려서 어떤 종류의 체념과 신념을 보고도 알지 못했던 거죠.

"인생은 작가의 서가에 비유할 수 있다. 몇 권쯤이야 그가 직접 썼다고 해도 대부분의 책들은 이미 그를 위해 씌어져 있는 것이다."
첫강의 때 선생님이 칠판에 쓰셨던 Fosdick의 이 말이 새삼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삶은 유희적인 것과 유희가 아닌 것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아요. 잡을 수도 볼 수도 없는 허수가 실수들을 교란하고 지배한다는 느낌.

덧: 이제부터 아버지와 몇 시간은 걸릴 바둑대국에 들어갑니다. 작년부터 제게 한번도 못 이기셨는데 한 수 배우겠다는 겸양의 자세 없이 계속 도전하시네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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