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15 02:38
- 구체적 스포일러는 없지만 영화 자체가 딱히 스포일러랄 게 없는 전개이기도 하고... 대략 어떤 방향으로의 엔딩이 될지를 어렴풋이 짐작할 만한 힌트는 들어가 있는 글입니다.
- 심심하고 여유가 되면서 호러를 좋아하시면 이걸 먼저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 단편이 원작이고 이걸 인상깊게 본 길예르모 델 토로가 '내가 다 해줄게 장편으로 만들어봐' 해서 만들어진 게 넷플릭스에 있는 그 영화라고 합니다.
- 증권 투자 일을 하다가 재산을 다 날리고 멘탈을 내려 놓은 한 아저씨가 홧김에 동료와 아내를 쏴 죽이고 딸 둘을 데리고 달아납니다. 그러다 아주 수상쩍은 산장 안으로 들어가서는... 뭐 이런저런 일이 일어난 후 무려 5년 후 이 자매가 아까 그 아저씨의 동생에 의해 발견됩니다. 그 사이 '늑대 아이' 같은 상태가 되어 버린 자매는 화가 삼촌과 애 낳기 싫어하는 전직 락커 애인에게 양육되며 의도가 아주 불순한 의사 아저씨의 연구 대상이 되는데 당연히도 그동안 이 자매를 보살펴 준 듯한 수수께끼의 존재가 그들 주변에 어슬렁거리기 시작하고...
- 원작이 워낙 짧고 무슨 이야기랄만한 게 없는 물건이다 보니 둘을 연결지어 이야기할만한 부분은 없습니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원작과 이 영화를 감독하고 각본을 쓴 사람들이 그렇게 훌륭한 이야기꾼은 아니라는 겁니다. 도입부의 애들 아빠 행동에서부터 '도대체 쟤가 왜 저러지?' 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시나리오는 끝까지 그렇게 좋아지지 않아요. 등장 인물들의 감정은 전개를 위해 빠르게 도약하고 또 의사나 애들 이모 같은 사람의 행동은 설명이 부족해서 쌩뚱맞구요. 페이스가 그렇게 좋지도 않습니다. 막판 클라이막스의 전개 같은 건 분명히 좀 늘어지죠. 게다가 장편이 되기 위해 등장한 '마마'라는 존재의 뒷이야기는 정말로 진부하기 짝이 없거든요. 여기에다가 '결말도 그리 맘에 들지 않았다'는 소감까지 덧붙이면 정말 악평이 따로 없겠죠.
- 하지만 이게 꽤 재밌습니다.
일단 기본적으로 이게 호러 영화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감독에겐 호러 장면들에 대한 아이디어가 많아요. 이미 단편에서 살짝 보여줬던 '마마'를 데리고 이렇게 저렇게 다양하게 알차게 써먹는 것은 기본이고 '마마'쑈 하나로는 부족할 것을 대비해서 준비해 놓은 아이디어들이 심심할만 할 때마다 하나씩 툭툭 튀어나오는데 이게 상당히 타율이 좋습니다. 그러다보니 다 보고 나서 평을 나쁘게 할 수가 없죠. 호러 영화인데 호러를 제대로, 열심히 해서 보여주니까요.
그리고 단편에서도 인상적인 괴물이었던 '마마' 캐릭터를 좀 더 다듬고 아이디어를 추가해서 보여주는데 그게 또 나름 개성있고 괜찮습니다. 마마 입장의 플래시백 장면들 같은 걸 보면 시각적으로 꽤 재밌게 잘 만들어 놨어요.
그리고 배우들이 참 잘 합니다. 일단 귀여운 어린애들이 호러의 주인공인 것부터가 일종의 치트키인데, 얘들이 귀엽고 연기도 잘 한단 말이죠. 게다가 이 아가들을 이끌고 나가는 주인공이 우리(?)의 제시카 차스테인 여사님입니다. 여사님께서 까만 단발에 스모키 메이크업을 한 락커로 나와주시니 일단 보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은혜로운데 거기에 덧붙여 당연히 연기도 잘 해주시니 캐릭터 감정 변화가 어떻고 스토리가 어떻고 신경 쓸 틈이 없습니다. 그냥 압도적인 감사를 드리며 몰입해 주는 수밖에요.
- 결론은 이렇습니다.
스토리나 캐릭터들의 진부함과 구멍 때문에 그렇게 좋은 평은 못 해주겠어요. 하지만 어쨌거나 개성 있고 성실하게 잘 만든 호러 영화이긴 합니다. 그러니 호러 영화 좋아하시는 분들은 걍 가벼운 마음과 기대감으로 한 번 봐주시면 돼요. 아마 크게 후회하진 않으실 겁니다.
그리고 차스테인 여사님에게 호감이 있는 분들이라면 꼭 보세요. 여사님 만세(...)
- 클라이막스의 대결 장면은 좀 '전설의 고향' 생각도 나고 듀나님에게 싸늘하게 까이고 조롱당하던 2000년대 초반 망한 한국 호러 영화들 생각도 나고 그랬습니다. 그만큼 구렸단 얘기는 아니구요, 그냥 정서가 꽤 비슷해서요. 스페인 쪽 정서가 그런 걸까요.
- 요즘에 보기 드물게 영화 속 이야기가 끝난 후 살아 남은 등장인물의 현실 뒷감당이 걱정되는 이야기였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잘 살아갈 방법이 안 보이는데 말입니다. 흠...;
- 아빠 그 자식은 참 답이 없더군요. 아니 자기가 그 짓(?)을 해 놓고 나중에 또 그런(?) 행동을 하는 건 뭔지. 재수 없기 짝이 없었네요.
어찌보면 이 또한 찌질한 남자들 몇 때문에 죄 없는 여자들이 개고생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아빠놈 때문에 엄마는 죽었죠, 애들은 그 고생을 하죠. 삼촌 녀석은 그래도 뭐 나쁜 놈까진 아닙니다만 어쨌거나 자기 여자 친구에게 자기 고생에 동참할 것을 그렇게 당당하게 요구하는 건 영 아니죠. 박사 그 인간도 마찬가지구요.
- 크레딧을 다 보고 나면 원작 단편과 똑같은 글씨체로 'Mama' 라는 글짜가 화면에 새겨집니다만. 결말이 결말이다 보니 그걸 보는 느낌이 전혀 달라지는 게 재밌었습니다.
- 넷플릭스의 영화 소개글이 참 걸작입니다.
"실종 5년 만에 야생 동물 같은 상태로 발견된 어린 두 조카. 집으로 데려와 정성껏 보살피지만 자꾸 엄마를 부르는 건 단순한 그리움일까? 엄마의 사랑, 죽어서도 영원하다."
마지막 문장 정말 끝내주지 않나요. ㅋㅋㅋㅋ 그래도 영화 내용은 제대로 알고 적은 소개글 같긴 해요.
- 시나리오 문제만 해결하면 참 좋은 호러 감독이 되겠는데... 라고 생각하면서 검색을 해 보니 이 영화 감독 양반이 '그것' 1과 2를 감독한 사람이었군요. 허허허. 사람들 생각하는 건 다 비슷한가 봅니다. 본인 시나리오 미뤄두고 스티븐 킹 각색을 받아드니 버프가 장난이 아니었군요. 그리고... 속편에서 제시카 차스테인을 캐스팅 한 것도 이 영화를 함께 한 영향이 없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ㅋㅋ
2019.09.15 14:48
2019.09.15 18:16
네 정말 보면서 딱 그게 생각났어요. 전설의 고향. ㅋㅋ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 인상적인 단편을 장편화 시켰는데 이 정도면 상당히 선방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이래저래 재밌게 봤습니다.
2019.09.15 18:24
어렸을때 제일 인상적인 악몽이 부모님이 귀신으로 바뀌는 꿈이었는데, 아마 어린이들 마음에는 부모가 '믿을수없는' 존재가 되면 어쩌지'라는 근본적인 공포가 있는게 아닌가 싶어요. 그걸 기억해내서 이런 얘기가 나오는가 싶기도하고. 샤이닝도 그렇고 킹의 얘기들중에서도 이런 '끔찍스러우면서도 사랑했거나 여전히 집착하게 되는' 존재로서의 부모가 가끔 나오죠 - 그래서 큐브릭의 샤이닝도 좋지만 여전히 원작이 좋다는.
나이가 들면서 공포물을 봐도 좀 심드렁한데 - 현실에 사실 정말 무서운것들이 많아서인지. - 슬픔과 공포가 합쳐진 스토리라인은 그래도 좀 임팩트가 있는것 같네요. 힐하우스의 유령도 그래서 좋았구요.
2019.09.16 08:50
아무래도 이게 애 키우는 입장이 된지 몇 년이 되니 부모-자식 관계, 특히 어린 자식들이 나오는 이야기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더라구요. 예전엔 그런 코드 되게 식상하다고 생각했는데. ㅋㅋ 이 영화 '마마'도 그렇고 '힐하우스의 유령'도 그렇고 다 모자랐던 부모와 인생 꼬인 어린 자식들 이야기라서 보면서 더 이입도 하고 갑갑해 하기도 했던 것 같아요.
영화제에서 단편을 봤을 때는 너무 무서웠는데(반쯤 졸면서 단편영화들을 보다가 잠이 확 깼어요), 장편으로 만들기 위해 살을 붙이다보니 처음의 그 공포는 조금 약해진듯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