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갈까

2019.10.20 11:07

Sonny 조회 수:763

삶에서 목적지를 고민할 일은 많지 않습니다. 미리 정해진 약속들은 도착해야 할 곳을 으름장처럼 각인시켜놓죠. 몇시까지는 어디로, 누굴 만나기 위해서는 어디로, 뭘 듣기 위해서는 어디로. 장소에 대한 고민 전에 우리는 책임을 제 때에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합니다. 가야 하고, 다행히 왔고. 이 사치스런 고민은 대개 여행 중이거나 갑자기 목적이 사라져버렸을 때만 작동하죠. 그럼 어떻게 하지? 느낌표가 없이 삶을 유영할 수 있는 것도 낭비의 기회입니다. 때로는 여행에서조차 이 일탈을 허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렇게 철두철미한 의무 사이에서도 삶은 헤맵니다. "앞으로" 라는 미래시제가 붙으면 우리는 간다는 확정 대신 질문을 하게 되요. 어디로 가야할까. 거기로 가도 되는 것일까. 손석희 아나운서는 가호지세라는 말을 썼습니다.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것처럼 두려움을 꽉 깨물고 질주하리라고. 하지만 모두가 결연하게, 후회없이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망설이고 두려워해야 해요. 어떤 이정표는 사실 누군가 화살표를 거꾸로 돌려놓은 것일테고 어떤 표지판은 이미 없어진 길일 수 있고. 그래도 짐짓 대범한 척 발걸음을 옮깁니다. 삶이 성큼성큼 소리를 낼 때마다 아래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개는 꼿꼿이. 한번이라도 시선을 돌리면 후회나 망설임이 엄습해버릴 것처럼. 그런데요. 하루종일 전진하는 게 삶이 아니란 게 문제입니다. 밤이 되면 멈추고 우리는 눕습니다. 대개 어둠은 아무 것도 대답해주지 않고, 간절한 질문들을 꿀떡 삼켜버리죠. 눈을 감고 자문자답의 방황을 시작해봅니다. 어디로 갈까. 수많은 지도를 들고 현재로부터 미래로의 선을 그어보지만 무엇 하나 하이라이트로 빛나질 않아요. 의문문 뒤의 물음표는 탄력을 잃고 질문자 곁에 함께 쓰러집니다. 어디로. 그런데 가긴 가는 걸까. 물음표 마지막에 찍는 점은 튀어오르는 고무라고 생각했는데, 선이 되지 못하고 흘러내릴 우유부단함일지도 모릅니다. 모르겠어서, 우리는 물음표처럼 침대 위에서 옆으로 누워 새우처럼 몸을 구부립니다. 


그러니까 무언가를 씁니다. 정렬된 무형의 선 위로 정갈하게 나열되는 글자들은 그 자체로 길이 됩니다. 어디론가는 가고 있어요. 알맹이가 헤맬 지언정 문자라는 껍질은 또렷하게 선을 이어가요. 어디로 가냐구요. 저 오른쪽, 맨 아래를 향해 나아갑니다. 얼마나 길게 갈 지는 모르겠지만, 최후의 마침표는 여하튼 문장 아래에 놓일테니까요. 여기까지. 멈추지 않는 삶 속에서 우리는 잠이라는 잠깐의 안식 뒤에 또 눈을 뜨고 숨을 뱉으며 하루를 이어가야하지만 글은 거기서 끝입니다. 시간을 초월해서 저마다의 완결을 박제하는 기록들. 어디로 갈 지 그 고민이 끝맺음을 만날 수 있는 행위들. 목적이 없어도 좋아요. 글은 헤매일 수 있는 자유니까요. 어릿광대의 기억으로, 누군가의 목소리로, 추상과 관념으로 글은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 순간 질문에 맞닥뜨리고 설렙니다. 삶은 정녕 가는 것인가. 결단코 순환하지 않는 일방향의 시간 속에서, 왜 누군가의 글은 삶이 부유하는 것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 시간의 대지 위에 자국을 남기고 출발점으로부터 한없이 멀어지는 것만을 계획한 우리가,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기억을 소재삼아 재구성된 그 글 속에서, 분명 사회의 규칙을 따라 오른쪽 아래로 시선은 향하고 있는데 왜 의식은 언어 위를 떠다니고 있는가. 어떤 글은, 무중력을 부여합니다. 


새삼 깨닫습니다. 가벼워진 의식을 글 속에 내던지면서, 제약을 푸는 열쇠는 어떤 언어의 세계에 숨어있다는 걸. 깃털처럼 가볍게, plume처럼 삶의 무게를 희롱해요. 나는 지금 돈도 내일도 감히 고민하지 않고 유익과 유의미를 찾아 놀고 있다고. 그리고 상상합니다. 지구가 도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고. 자전의 소리와 공전의 소리는 따로따로 나는 것일까요? 지구는 묻지 않겠지만 그 넓디넓은 행성에서 저는 한가롭게 묻죠. 어디로 갈까. 분노와 정의가 진격을 명할 때, 저는 눕되 쓰러지고 싶진 않아요. 그래서 혼자 중얼거립니다. 어디로갈까. 글이 또 올라오면 쓰여진 글들을 밟으며 저의 의식은 둥실거리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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