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고레에다 히로카즈

2019.09.18 19:00

Sonny 조회 수:540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는 가족과 가장 함께 보고 싶은 영화이면서도 가족과는 정말 보기 힘든 영화입니다. 오히려 <바닷마을 다이어리>같은 영화라면 그저 말랑말랑 네 자매의 우애로 볼 수 있을지 몰라요. 그러나 부모가 이미 부재중에 가까운 이 영화와 달리, 부모자식 모두가 생존한 상태로 재회하고 이별하고 언성을 높이다 평화를 찾아가는 다른 영화들은 부모님과 볼 엄두가 나지 않아요. 이해와 망각으로 화해를 이루는 그 결론보다, 거기에 다다르기까지 겪는 일련의 과정이 그 순간 자체로 힘들기 때문일 거에요. 현실의 가족은 언제 싸웠냐는듯, 아무 일도 없는 척을 하며 평화를 가장하고 있으니까요. 영화 속 불편한 티격태격을 보며 그 어떤 가족이라도 본인들의 과거사를 떠올리고 말 겁니다. 영화는 솜씨좋은 감독이 편집을 통해 몇일 몇년을 순식간에 압축시킬 수 있지만 현실은... <걸어도 걸어도>를 보고 난 후의 감상이 그랬어요. 우리 가족이 다 같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데 절대 그렇게 볼 수는 없겠다. 특히나 부자간의 껄끄러운 맞물림이 이 영화의 주요 내용이길래 아버지와는 이 영화를 절대 보지 못하겠더라구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보고도 싶었지만 뭔가 무언의 메시지로 오해될 것 같아서 그것도 포기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그렇게 비정한 사람은 아니거든요.

올 추석 내려가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별 일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갈등이 아직 봉해져있는 영화 초반부만 같으면 좋겠다... 정말 별 일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영화보다 훨씬 재미가 없었어요. 현실은 감독의 디렉션과 배우의 찰진 연기가 조합된 결과물이 아니니까요. 그나마 영화에 가까웠던 장면이라면 엄마와 제가 전을 부치며 투닥거리던 순간일까요. 엄마 새우튀김은? 올해는 베트남 새우들이 뭐가 안좋다고 해서 새우는 패스다~ 아....안돼애에에에에에에

가족의 평화는 영화처럼 웃음 넘치고 오순도순 그려지지 않죠. 그걸 제가 잠깐 간과했어요. 싸우지 않으면 그걸로 땡입니다. 그저 누구는 멀뚱히 티비보고, 누구는 큰 방에서 티비보고, 누구는 작은 방에서 컴퓨터하고. 아마 제가 뭔가 조금은 가족다운걸 기대했던 모양이죠? 그런 연출을 좋아하는 제 동생이 남편과 오고 나서야 가족 영화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지긴 했습니다만... 약간 작위적이에요. 저희 엄마가 소금에 간장까지 너무 많이 넣어서 바다에서 막 건진 거 같은 잡채를 한 입 먹고 차마 빈 말도 못하던 불쌍한 매제...!! 제 동생은 이런 상황에서 그런 대사를 실제로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자기한테 이런 짜디짠 음식을 먹이면 어떡해 엄마~~" 연기를 굉장히 못하는 신인 배우가 오천번 연습한 것 같은 톤으로 제 동생은 망측한 말들을 자연스레 합니다. 뭔가 고레에다 영화 같진 않지만, 그래도 가족영화...

아버지는 가족영화같은 순간을 만들려고 애를 쓰는 편입니다. 고향에 내려왔으니 그래도 새로 지어진 케이블이라도 한번 타봐야 하지 않겠냐! 하지만 오랜만에 가족들끼리 이런 거라도 해보자~ 하는 마음이 느껴져서 좀 찡한 게 있었어요. 그리고 케이블은 별로 재미없었습니다. 사람도 너무 많고, 산 위를 조용히 오갈 뿐인 케이블이 뭐 그리 신나겠습니까. 아버지는 연신 사진을 찍었지만 거기에 담긴 저는 되게 뚱한 표정만 짓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그렇게 끝났습니다. 그래도 개판 오분전인 명절노림 한국영화를 보는 것보다는 나았습니다. 칼부림에 욕투성이인 영화를 보는 건 추석 가족 맞이라기엔 너무 찝찝하잖아요...

언젠가는, <어느 가족>을 다 같이 볼 수 있을지도 모르죠. 아니면 역시 무난하게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보는 게 좋을지도요. 안그래도 눈물이 많아진 아버지는, 그 소파 씬에서 엉엉 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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